- 꿈
N은 꿈을 만들어내고 그 파도를 즐기곤 했다. 아니 어쩌면 N이 꿈을 만든 것이 아니라, 꿈이 꿈을 부르며 자기들의 세상을 이루어나가는데, N이 거기에 섞여들었다 하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삶이 꼭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 그 흐름을 뒤틀고 엎어버리는 배신을 맞기도 했다.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고 굳게 믿어왔던 이들의 매듭놀이에 깨어진 N의 낭만과 믿음의 잔해 그 얼음조각을 내려다보아야하는 고통. 크고 작은 얼음조각에 몇 번 찔렸을 뿐인데도, 그 아픔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뒤틀리고 엎어진 꿈? 이제 N은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묻는다. 혹 엎어진 것은 그 꿈 자체가 아니라, 다만 그 꿈을 향한 길이었을 뿐 아닌가? 꿈은 언제나처럼 그곳에서 그대로 흐르고 있는데 말이다. 혹 N이 아픔으로 내려다 본 그것은 무너진 길의 잔해였고, 절망으로 산산조각 난 N 자신의 마음이었을 뿐 아니었던가? N은 생각한다.
꿈으로 가는 길? 그것이 꿈이건, 그 꿈을 향한 열차건, 그 어느 흐름의 그림도 나로부터 나온 것이고, 내가 아는 만큼 그린 것이다. 모르는 것을 그릴 수는 없는 일이니 그것이 한계다. 본질적 한계다. 삶은 남과의 만남이요 뒤섞이는 흐름이니, 내 그림이 흔들린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삶이란 이야기의 자연스런 흐름의 결과다.
인생은 마라톤. N은 이 이야기를 끔찍이 싫어한다. 마라톤에는 꿈이 없고 목표만 있다. 달림은 고통과 참음이요, 다른 길로 들어섬은 곧 패배다. 꿈만 있다면 그 어느 그 어떤 과정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고, 또 그러기에, 길섶 꽃향기 즐기는 것도, 옆길로 들어서 헤매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다 허용되어야 삶다운 삶 아닌가.
- 새 터전을 찾아
스러져가는 몸을 추스르며 N은 생각한다.
연장이냐 시작이냐. 자연스런 귀결은 당연히 하나. 이제 끝을 내자. 이생을 끝내자. N은 산을 찾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렸을 적,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랬듯이, 괴로움이 쌓일 때마다 그랬듯이. 해가 진 다음이건 아직 짙은 어둠 속 새벽이건 상관없이 산길로 들어선다. 부대낌 없는 그곳으로 몸을 이끈다.
이번은 그때와는 다르다. 이젠 마음도 몸도 다한 상태다. 마무리 상태. 하지만 아쉬움이 전혀 없다. 극한상황을 만들어나간다. 평소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깊은 산 어려운 곳으로 마지막 한 방울의 기운까지도 짜내며 기어든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데도 N의 발은 움직여나간다. 마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앞을 향하는 병사처럼.
산행이 계속되며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니 점점 차갑게 모질어져간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 이생을 끝낸다는 것과 목숨의 끝내는 것이 동격은 아니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삶의 이해, 삶의 터전과 방식, 이것들의 새로운 시작이면 충분하다. 과거를 떠나자 떠나. 이제까지의 터전을 떠나자. 그래 인간을 떠나자. 이것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마감하자. 서울을 떠나자. 새로운 터전에서 새 삶을 시작하자.
N의 발걸음과 눈길은 이제 빛깔을 달리한다. 새 터를 찾아 곳곳을 헤매던 N의 마음이 지리산 자락 몇 군데로 가닥을 잡는다. 하나는 깊고 깊은 산속이다. 사람의 숨결 그 흔적만이 남아있는 곳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강가다. 산이 아직 끝나지 않고 바다가 멀지 않은 곳이다. 이곳 중 하나다. 우선 세를 들어 살면서 어느 쪽을 정착의 장소로 정할지 곰곰이 더 생각해보기로 하자.
삶은 부딪침이 빚어내는 빛과 소리의 흐름이라 했었지. 옛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우연의 불꽃이 튕긴다. 자신보다 더 깊고 급한 어려움에 빠진 친구. 그가 도움을 구한다. 그 처절한 배신의 대가로 N이 받아 지니고 있던 그 액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그가 그 반대급부로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의 노후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터뿐이라는 것.
이야기가 나온 다음날 일찍 N은 눈 덮인 산길을 꼬불꼬불 돌아 그가 이야기해준 마을회관 앞 그곳을 찾는다. 검은 비닐이 사방에 어지럽게 나뒹굴고 쓰레기더미가 여기저기 쌓여있는 황량한 그 곳에 고추를 키웠던 흔적이 보이고, 그 아래 계곡 쪽으로 백년도 훨씬 넘게 이곳을 지켜왔음직한 소나무가 이삼십 그루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화로 주변 모양을 설명하며 N은 이곳이 바로 그가 말한 곳임을 확인하고 또 한다. N은 생각한다. 이건 내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에게 선물을 안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나무 숲을 어디 가서 또 볼 수 있단 말인가.
도움의 마음이 계산으로 바뀌며 결정합리화의 과정이 끝난다. 바로 그 다음날로 매매절차가 끝나고, 새로운 터를 찾아 헤매던 N 마음의 방황에도 마침표가 찍힌다.
삶은 언제나 그렇다. 특히 나름대로의 계산으로 신중해야함을 무시했을 때. 그 즉흥적 매매는 N에게 또 하나의 아픔을 심어준다. N이 본 그 곳 노른자위 부분에 쐐기에 찔려있다. 자연스런 모자이크 밭 동네 가운데로 도로가 지나면서 남겨놓은 흔적이었다. 상황은 틀어졌다. 이 쐐기 모양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렵사리 만난 그 주인, 내 양보 없으면 당신 땅은 무용지물, 조롱조의 콧노래다. N의 마음은 다시 한 번 바닥 모를 낭떠러지로 떨어져간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랴. 지적도 한 번 떼어보지도 않고 매매 절차를 서둘러 마친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탓할 일이지.
세상일은 언제나 그렇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 그 가까운 사람이 그 어려움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면, 가까운 사람에게 부탁했겠나. 언제나 마지막 수단은 가까운 사람에 기대는 것뿐이고, 바로 그 바턴을 이어받은 그 가까운 사람이 그때부터 다른 방법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고. 친구는 그 바턴을 이어받았었고, 이제 그 다음 주자로 N이 뽑힌 것이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 그것이 정공법이다. 온갖 수모를 무릅써가며 N은 결국 그 쐐기의 거래를 성사시킨다. 안도의 숨을 내 쉬며 N은 스스로를 타이른다. 삶이란 흐름엔 헤맴도 자연스런 일부라고. 또 헤맴엔 그 자체의 의미가 있다고. 지금까지의 삶이 그래왔지 않은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고. 이번의 부산물은 마을사람들과의 친화였다. 이번 과정에서 부딪치며 스쳐간 사람들과의 대화. 그것은 거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꿈을 향한 흐름에서 전화위복이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필연적 귀결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의 로마는 꿈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의 서울 역시 꿈이다. 꿈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음을 잊지 않기만 한다면, 다른 길로 다른 세계로 벗어난다는 것이 곧 나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다른 세계에도 삶이 있지 않은가. 또 그 다른 삶을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잘 아는 길을 벗어난 사람에게 호기심어린 관찰, 조심스러운 판단, 신중한 행동은 본능적 속성이다. 사람의 삶에서 예정에 없던 다른 길로 들어선다는 것. 그것은 때로 그 본래의 궤도에 남아있으며 의도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결과라는 웃음을 선사하는 것. 그것 또한 삶의 진실 아닌가.
- 마침표
이제 미루고 미뤄왔던 일에 결말을 낼 차례다. 직장을 정리하고 떠나는 것. N은 평생 꿈으로 살아왔고, 그의 직장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이었다. 몸과 마음이 이토록 피폐해진 상태에서, 나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자리가 아까워 시간만 보내는 것, 그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젊은 피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그것만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결정이다.
그런 생각으로 필요한 결정을 내린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정작 사표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써지질 않는다. 우선, 보장된 정년을 앞당겨 포기한다는 것이 N의 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함께 물러나자고 요구하는 그런 상징적 행동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 그런 생각방법이 있다는 것에 N이 놀란다. 오랫동안 공동운명체의 구성원으로 지내왔던 사람으로 할 일이 아니다.
두 번째 어려움은 억울함 때문이다. 일찍 젊은 피에게 자리를 물려준다는 것은 진정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슨 조직을 배반하고 나가는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각종 불이익이 안겨지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른 불이익엔 그저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지막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연금까지도 대폭 삭감되는 그런 불이익은 정말 억울하다.
여기에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어려움이 더해진다. Mrs. N의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일. 실직자의 아내. 남자는 열정으로 살고, 부인은 남편의 명함으로 산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그 이유가 아름답다하더라도 명함이 없어진 남편의 모습이 자신의 일로 닥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마음속에 들어있는 진짜생각이 무엇인지, N은 그 합리화 작업을 시작한다. 현대인답게 계산을 곁들여. 얼마 오래지 않아 N은 그 계산의 결과를 반려자에게 내보이며 동의를 구한다.
직장을 일찍 떠나는 대가로 치러야하는 경제적 손실, 즉 날아가는 연봉과 손해나는 연금 그 액수를 α라 하자.
무리하게 정년이 될 때까지 4년 더 버티느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악화된다면 정년 후 삼년은 살겠지. 물론 숨이 넘어간다는 그런 말은 아니고, 우리가 제2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그런 기간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지금 그만둔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 당장부터 제2의 인생은 시작되는 것이고, 그렇게 4년 지내면서 심신이 회복될 수만 있다면 정년 후 3년이 아니라 6년은 더 건강하게 지낼 수 있으니, 10년을 얻게 되는 것 아니겠어? 이것이야말로 건강을 돈 주고 사는, 아니 행복을 돈 주고 살 수 있다는 산 증거가 아니고 뭐겠어.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 왜 모르겠어.”
다른 반쪽 N의 대답에 이쪽 N은 이제, 드디어, 그 망설이고 망설이던 사표를 써 제출한다. 방에 가득한, 그동안 그렇게도 정들었던, 물건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N의 눈에 물기가 고인다.
다른 반쪽 N도 완전히 쇼크 상태에 빠져든다. 설마 하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무직자 남편.
그렇지만 N은 속으로 자유인 만세를 부른다. 이제 곧 면도를 하지 않아도 좋고,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은 자유인.
- 카프리치오소
이제 N에게 화폭이 생겼다. 꿈이란 그림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그릴 화폭이 생긴 것이다. 그에게 있어선 이 학고개에 세워질 집도 목표물이 아니라 그곳에서 펼쳐질 이야기의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이 일으키는 흐름. 그것은 또 하나의 꿈이다.
하지만 어쩐다. 그에겐 집 설계는커녕 그 비슷한 경험도 전혀 없었으니. 믿을 만한 몇 곳 찾아다니며 주변에 어울리는 멋진 집 설계를 받아보지만, 어쩐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그들이 제아무리 집 그리기 전문가라도 그 땅모양과 주변경관을 N보다 더 잘 알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런 괴리는 당연한 것 아닌가. 이번에는 설계라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배운다는 마음으로 의논을 곁들여 집 모양을 같이 그려나가기를 시도해보지만 오십보백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집 짓는 비용. 이것 또한 문제다. 건축비라는 것이, 종이에 그려지는 사각형모음이란 이차원적 면적에 평당 얼마, 그렇게 단순한 곱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사각형들에 삼차원적 멋을 곁들이면 일정 배수가 또 곱해지고, 또 주인의 개성을 살려 여기저기 꼬부리면 또 다른 어떤 숫자가 거기에 곱해지는 그런 고등수학이다. 마음에 드는 집을 지으려면 적어도 졸부수준의 배포는 있어야한다. 그렇다고 통장에 박혀있는 숫자에 맞추다보면, 이번엔 개성 없는 자연파괴 세리머니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이 딜레마를 벗어날 무슨 방법이 없을까? 문제의 근원은 간단하다. 건축업자에게 일을 통째로 맡기는 한 이 딜레마는 벗어날 수가 없다. 구걸하듯 부탁해 설계도 받아와서, 이번엔 또 그 설계도면을 시공업자에게 맡기고 구경만 하다, 나중에 다 되었습니다하고 건네주는 열쇠나 받아드는 그런 시스템. 이것을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다. 망설이기보다는, 과감하게 발 벗고 직접 그 모든 것을 해내는 것. 이것이 N이 얻은 답이다. ‘손수 설계하고 손수 집짓기’
이제 N의 발걸음이 사방으로 바빠지기 시작한다. 인터넷 뒤져가며 흙담집도 찾아가고, 귀틀집에서 묵어도 보느라 주말이 주중보다 바쁜 나날을 보낸다. 집짓기학교라는 곳도 알아보다가, 깜짝 놀란다. 연소자 입장불가가 아니라 ‘연로자 입학불가’의 원칙이 철저하다. 사고의 위험성 때문이란다. 그 장난 같은 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이 나이에 손수 집을 지을 수는 있을까. 막연한 불안감이 N을 엄습한다.
생각이 정리되며, 윤곽이 잡힌다. 시간에 쫓길 필요 없이 여유 있게 지을 수 있는 집은 오직 귀틀집. 집짓고 난 다음 아차 싶어 고칠 필요가 있을 때 그 어려움이 가장 덜한 것도 역시 귀틀집. 또 무엇보다도 노송들이 내려다보는 이곳에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모양의 집으로도 역시 귀틀집. 이제 싫든 좋든 직접설계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귀틀집 같은 값싼 집을 설계해줄 사람도 없고, 또 귀틀집설계 경험이 있는 설계사무소도 있을 리 없기에.
보통의 설계라면 사각형부터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다르다. 이곳이 어딘가. 신성한 기가 깃들어져 있다고 ‘바탕말림’이라고 불리는, 온 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또 마을사람들이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그 수령 백년이 넘는 소나무 수십 그루가 모여 있는, 길옆 밭 한 가운데 아닌가. 더구나 주말마다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바로 그곳에 아무리 강심장인 사람이라 해도 흉물스런 구조물을 집이랍시고 세워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다른 무슨 핑계가 필요하겠는가. 동화나라에 흉물을 올려놓은 모습을 제일 참지 못할 사람은 바로 N 그자신이니까. 학교 때도 또 그 이후 어느 때에도 가까이 해본 적 없는 입체적 그림그리기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옷의 모양을 만드는데 절대적 등급이 있을 수 없고 누구에게 입히느냐에 따라 그 옷의 가치가 정해지듯, 집짓기 역시 그 집의 자체의 사진만으로 그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이 주변과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정해진다. 이런 설계 작업은 절대가치 지향적 성격의 과정을 수반한다. N의 이 이단적 입양아가 꿈의 조건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N이 그 입양을 고집하는 것은 바로 그 집이 귀틀집이고, 귀틀집의 가치는 호화로움이나 크기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박함과 순박함에 의해 정해진다는 매력에 끌려서이다.
귀틀집. 예전에 화전민들이 다음 장소로 이전하기 전에 임시로 살 집을 짓던 방법이다. 주변에 널려있는 나무를 우물井자로 쌓아올리고, 그 빈틈을 역시 주변에서 구한 흙으로 채운 그런 집이다. 그런 배경에서 귀틀집은 기본적으로 한시적 용도를 위한 것이다. 내구성은 중요한 관점이 아니다. 하지만, N의 집은 다르다. 또 하나 있다. 화전민들의 집이야, 문자 그대로 산속에 있는 집이니, 주위의 평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N의 집은 바로 길가에 있는데, 어찌 그 모양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값싼 재료로 소박하게 짓는 집이라 하지만 N의 집은 그런 의미 보다는 스스로 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받은 집이다. 소박함이 초라함으로 전락할 그 정도로의 궁색함은 면하고 싶다. 비록 그렇게 하는데 비용이 조금 더 든다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또 그려봐도 한계를 벗어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목수가 아니라도 귀틀집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여기엔 기둥세우기가 필요 없다는 이유 때문인데, 기둥이 없는 집이라는 바로 이 점이 말썽이다. 성냥가치를 우물井자로 쌓아놓는다는 그 기본생각은 좋다. 하지만 문을 하나 만들면 거기엔 ㄷ자만 남고, 이번엔 창문 하나 더 트면 거기엔 ㄴ자 모양만 남고, 아예 벽마다 창문이 하나씩 들어서면 남는 것은 十자 모양이 된다. 그런 모양에선 기둥역할은커녕 홀로 서 있기도 힘들게 된다. 화전민처럼 집이 무너지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그런 집이라면 몰라도 오래오래 버텨야하는 N의 집으로는 적당치 않다.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인터넷 뒤져가며 사진들은 들여다보고, 유명하다는 펜션단지 찾아가서 요리조리 살펴도, 해결책이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각형 모양을 육각형으로 확장하는 난센스를 자랑이라 떠벌리고, 또 어느 곳에선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는 현장을 합판으로 눈가림하고 손님을 받기까지 한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N은 기둥井자 귀틀집이라는 아주 융통성 있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전통적 귀틀집’에서는 생각도 못할 벽 모양과 인테리어 장식을 built-in 형태로 심어 넣을 수 있는 아주 경제적 방법을. N은 ‘낭만의 집’을 수없이 그려보고 또 그려본다. 이 ‘발명품’이 그것으로 끝나는 매듭이 아니라, 낭만이라는 다음 흐름의 바탕이 되기에 N의 ‘꿈은 흐름이다’라는 주장에 맞는 것이고, 또 이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호화주택’을 지울 수 있기에, 이 집짓기가 N의 꿈 식구에 입양될 수 있는 적법성도 확보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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