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개솔숲 이야기

햄릿, 시인과 농부, 낭만의 대가

뚝틀이 2010. 2. 25. 01:13

- 햄릿이냐 돈키호테냐

 

일층은 선이 면을 만드는 수채화 작업이었지만, 이제 이층은 하나하나의 선이 그대로 살아나는 판화작업이 될 것이다. 어떤 모양을 만들 것인가. 원래 구상이었던 귀틀집이 당연히 우선순위 제1호다. 좋은 그림 만들기에 성공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일층 레미콘 작업 때 모른 척 외면했던,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집을 지을 수 있게 된다.

 

집착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수많은 종이들이 N의 연필 맛을 보고 휴지통으로 들어간다. 들어가고 또 들어간다. 하지만 아무리 여기를 올리고 저기를 내리고 돌려도 제대로 된 모양이 나오질 않는다. 작업복 바지위에 삼베저고리 입히기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번엔 아주 편하게 이층까지 레미콘을 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연한 유혹이다. 하지만 이층까지 레미콘 올릴 생각은 고려의 여지도 없는 탈락이다.

 

이번엔 칸트가 제 발로 찾아온다. 사람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어떤 결론에 도달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결론은 이미 생각 초기에 본능적으로 내린 것이고, 생각 또 생각한다는 것은 그 본능적 결론을 합리화시키는 이유를 모으는 것뿐이라고. 그 사람 참 용한 사람이다.

N의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역시 황토집이다. 처음부터 N의 마음은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황토벽을 입히는 보통의 집이었지만, 단지 비용 때문에 귀틀집이라는 대안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던 것이었다. 결국 시멘트벽 위에 황토벽이 앉는 작업복과 비단저고리 모양으로 생각이 굳어진다.

 

문제는 이 어울리지 않는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

-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물론 아래층 벽도 황토로 덧칠하여 위아래 전체적으로 황토분위기를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방법으론 집이 오히려 더 흉물스러워질 것 같다.

- 그렇다면 낙엽송 피죽으로 위아래를 모두 덮어버리면 어떨까도 생각해본다. 하지만 얇은 나무껍데기가 벽에 더덕더덕 붙어있는 모습은 더 궁상맞을 것 같다.

 

종이위에 그리지만 말고 한번 직접 보자. 제재소에 가서 여덟 치 낙엽송을 반으로 짜갠 것 잔뜩 실어와 한쪽 벽에 붙여 본다. 우려했던 것만큼 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건 아닌데’ 수준이다.

 

예술가가 따로 있던가. 아예 일이층 벽 전체를 화폭삼아 선도 그어 보고, 창문 사각형도 채워보며, 형상물을 만들 생각을 하여본다. 한복처럼 몸을 철저히 가리지 말고, 파티에 입고 나가는 옷처럼 황토 속살을 약간 드러나는 것이 더 섹시하지 않을까. 가로세로 무늬를 넣으며 블라우스를 입혀보니, 왼쪽 가슴엔 새끼 학이, 오른쪽 가슴엔 어미 학이 날아오르는 모양이 된다. 기술적으로 어려움은 있겠지만, 우선 보기엔 그럴 듯하다.

X는 시큰둥하고, Y는 야릇한 미소를 짓는데, C의 표정이 환해진다. 그러면 됐어. N이 속으로 무릎을 친다.

 

마침 창백한 서생이 집을 짓는 현장이 궁금하여 이곳을 찾았던 이 분야의 대가가 N의 스케치 더미를 들쳐보더니 한마디 한다. 야, 너 이제 전문가 다 됐구나. 하지만 한 가지 싫은 소리는 안 할 수가 없구나. 빗금은 피해. 어떤 건축가도 결국은 빗금무늬를 후회하거든.

그래? 그럼 난 빗금을 넣지. 남들과 다른 집.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거든. N의 구상은 끝났다.

 

아파트와도 다르고 펜션 같지도 않은 집을 짓는다고 할 때 N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것이 집 어디인가에는 천장이 아주 높은 방 하나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고, 거실 위를 뻥 뚫고 나머지 부분만 슬라브로 처리한 것은 바로 이런 가능성을 위한 것이었다.

 

거실 천장 서까래를 그대로 드러나게 하며 높은 천장을 만드는 것은 전원주택의 기본이다. 하지만 22자 폭의 거실에 12자짜리 서까래를 비스듬히 걸면 처마를 뽑을 여유가 없어진다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N은 C와 Y의 자문을 구한다. 대들보를 하나만 올리는 대신 쌍으로 올리기는 것이 그 답이다. 대들보 사이의 간격, 서까래의 길이와 각도, 또 지붕 높이와 이층 바닥 높이를 고려하여 계산하니 거실 천장의 높이가 4미터나 된다.

 

쌍 대들보 위쪽에 잔디를 입히거나 야생화를 뿌리기로하고, 지붕그림을 그려보던 N이 질겁한다. 그 지붕이 생각대로 각이 날카롭게 진다면 몰라도 흙을 올리다보면 어느 정도 둥글게 될 수밖에 없는데, 이건 영락없는 무덤모양이다.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라고 가볍게 웃어넘길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무덤모양. 그렇다고, 여기에 단순히 지붕을 올리기에는 그 넓은 공간이 너무 아깝고, 또 합각지붕이 여기저기 올라가있는 어지러운 모양이 된다.

이럴 경우엔 오랜 궁리가 있을 수 없다. 테라스로 처리하지.

.

이제 지붕 차례다, N은 지난겨울 따뜻한 털모자 사러 가게에 갔던 기억을 떠올린다. 얼마나 고르고 골랐는지. 머리에 보온덮개 씌운다는 당연한 기능보다는 그 모자를 쓴 N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가에 따라 그의 안사람 고개 흔드는 방향이 달라졌던 것.

 

지붕이라는 것도 단지 햇볕과 눈비로부터 집을 보호해주는 당연한 기능보다는 그 모양과 재료에 따라 집의 분위기를 살리고 죽이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생각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우선 모양이라는 부분에는 당연히 주변 소나무 숲과의 조화가 제일의 관점이고, 한쪽 테라스부분과 다른 한쪽 황토 집 부분에 어떻게 어울리는가가 제이의 관점이다.

 

전원주택에서 흔히 보는 뾰족지붕이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얽혀있는 모양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두덩어리의 지붕으로 단순화시킨다. 그렇게 되면 지붕의 폭이 넓어져 높이도 올라가게 되는데, 비탈길 소나무의 높이를 고려하여 물매를 최대한 낮춘다. 앞서 그린 두 마리 학을 그 물매에 맞춰 다시 그려보니 어느 정도 봐줄만 하다.

 

마침 때맞춰 주문했던 원목이 들어온다. 원래는 귀틀집 용도로 주문한 것인데, 대여섯 치 굵기의 더글러스는 이제 더 구하기 힘들다는 목재상의 하소연도 있었고, 또 이미 상황도 바뀌어 원래주문을 고집할 마음도 없었기에, 그곳 목재상에 재고로 남아있던 스프루스를 그대로 받아오기로 타협한 것이다. 그런 중간 과정을 알지 못하는 N의 안사람이 열다섯 자 길이 일고여덟 치 나무가 한차 가득 실려 있는 것을 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N을 보며 묻는다. 당신 정말 이런 나무로 혼자 집을 지으려 했던 거야? 일하던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쳐다보며 키득키득 웃는다.

 

이제 이 스프루스 기둥과 황토벽에 어울리는 지붕 재료를 생각할 차례다.

당연히 아스팔트 슁글은 고려대상에서 탈락이다. 기와지붕을 올릴 수도 없다. 모양도 모양이거니와 그 큼직큼직한 지붕무게를 견디는 일이 보통이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초가지붕도 아니다. 그 넓이, 그 물매에서 초가지붕의 배수기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모양도 전혀 어울리질 않는다. 제재소에 가서 타스마니아 목재를 켜고 남은 피죽을 사다 모형에 얹어보지만 너무 누더기 냄새가 난다. 이번엔 멀리 가평까지 가서 잘 다듬어진 낙엽송 껍질 조각을 사와 시도해본다. 그럴 듯하다.

 

- 시인과 농부

 

레미콘 위주의 작업단계가 끝나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법석을 떨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갑자기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요란함 속에서는 개인이 전체에 묻혀버리지만, 차분함 속에서는 개별악기의 선율이 들린다. 이제 시인과 농부가 경기병을 몰아낸 형국이 되었고,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집합체가 아닌 D,E,F,G,X라는 개인의 모습이 N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개인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N과 그들의 만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남은 반가운 것이다. 우리 만남의 비극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만남이란 것이다. N은 일자리를 주고 결과를 받고, 그들은 일을 주고. 보수를 받고.

 

물론 C라는 완충적 존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주 역할은 N의 구상을 실체화시키는 것이고, 일하는 사람들을 독려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결국 그 사람들을 다뤄야하는 것은 건축주의 몫인데, 이건 N이 겪었던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이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다.

 

N의 직업도 사실 근본적으로는 사람을 다루는 것이었다. 다룬다기보다는 다듬으며 같이 크는 것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N이 겪었던 그 만남에는 하나의 필수적 전제조건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믿음. 믿음? 여기에선 그런 것이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고, 또 존재해서도 안 될 개념이다.

 

최인석의 소설에서 펼쳐지던 그 지리산 그림이 지금 이 학고개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 그들은 근본적으로 일당을 받는 사람들이다. 일을 잘해도 못해도 일을 많이 해도 적게 해도 그 일당엔 변함이 없다.

- 그중 하나가 욕심을 내어 일을 잘하게 되면 비교대상이 되는 그 옆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는 의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고,

- 더구나 그들 중 누가 일을 많이 하게 되면 그들 전체의 다음날 일거리를 줄이는 것이니 이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일을 하면 할수록 몸에 무리가 오거나 다칠 확률이 더욱 높아지니 어쩌면 당연한 분위기라고 할만도 하다.

 

더구나 N의 집짓기에는 낭만이라는 독소가 더 들어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사실 이들이 다른 곳에서 익숙하게 해왔던 그런 것과는 다르니, 말썽의 소지가 한 단계 더 높게 심어져있는 것이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해본 경험이 없는 일을 부탁하는 것은 금기사항에 가깝다. 무엇 때문에 골치 아픈 일에 손을 대고, 익숙하지 못한 일로 자신의 실력이 드러내야 하겠는가. 좀 더 생각해보자는 말로, 이런저런 핑계로 시간을 끌며, 결국 그들이 원하는 편한 쪽으로 유도하려 애쓰는 동안, 건축주의 애간장은 타들어간다.

 

어느덧, 구상했던 대로, 거실 천장에 육중한 대들보 두 개가 걸린다. 깎아내고 다듬으며 그 대들보 모양을 만드는데도 한 주일이나 걸렸던 커다란 덩치고, 크레인으로 이 덩치를 들어 올리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상량식. 대들보 걸리는 날은 인부들의 잔칫날이다. 보통 대들보엔 龍자와 龜자 크게 쓰고 그 두 글자 사이에 기원문과 날짜를 쓰지만, N은 이런 것을 생략한다. 그냥 깨끗한 천장 디자인이 그런 글자보다 더 좋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상량식이 시작된다. 사회를 보는 이가 ‘오늘 주인이 여러 번 절을 해야 할 것이라’ 미리 선포하는데, 순진한 N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충분한 액수를 미리 넣어둔 봉투를 돼지 머리에 꽂고 여러 차례 고래 숙여 절을 올린다. 사회자가 또 다시 절을 하라 요구할 때, 그때가 되어서야, 여러 번 돈을 꽂으라는 이야기란 걸 알아차린다. 솔직한 것이 최고지. N이 답한다. ‘저 봉투에 여러분 섭섭지 않을 만큼 넣었으니 안심하세요.’

이어서 사회자가 마을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지명하며 절을 올리게 하는데, N의 속이 울컥 뒤집힌다. ‘이건 민폐다. 내 오늘 기쁜 날이라 저들을 모셔왔는데, 저들의 주머니에 부담만 주는 결과가 되었구나.’

 

물론 어떤 일에 대해 금전적으로만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는 하다. 만나는 사람이 다 똑같은 것도 아니고, 같은 사람을 만난다 하더라고 어떤 성격으로 만났는가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의 이 만남은 인부들과 ‘그 이외’의 사람들의 만남이다. 만남의 성격에 따라 평가가 결정된다면, 이 집짓기에서의 만남은 이미 애초부터 객관적일 수가 없다.

 

N이 입장을 바꿔, 그들의 눈에 비친,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신이라는 존재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저 사람 한평생 편하게 살다가 이제 편히 쉬러 이곳에 오겠다 그거지.’ 그렇다면 어차피 처음부터 호감을 가질 수 없도록 되어있는 관계설정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N이 그들 중에 하나였더라도, 외지에서 침입한 도시인을 보는 눈이 곱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N이 그 외지인에게서 얻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 낭만의 대가

 

황토벽돌 찍기에서 N은 낭만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톡톡히 배운다. 공장에서 찍은 황토벽돌을 사왔다면 단순히 단가 곱하기 개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본 공장벽돌들은 색깔이 너무 맑았고, 모양도 너무 완벽했고, 또 무엇보다도 너무 단단했다. 겹치는 ‘너무’에 ‘황토 성분도 들어있는’ 벽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C의 말을 빌면 하루 삼백장만 찍는다면 직접 찍는 것이 오히려 더 경제적이란다. 벽돌공장에서 사오는 것보다 비용이 절감된다니, 한번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서너 명이 긴 자루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찍어내는 벽돌의 투박한 모양에 반한다. 한편 이런 ‘대롱대롱’의 비인간적 모습에 그의 마음이 아파온다. 40대 D와 G는 그래도 괜찮지만 50대 E와 F에겐 일종의 연민까지 느낀다. 하지만 그건 처음 이틀뿐이었다. F의 ‘한 대 피고 일하지.’가 잦아들더니, ‘더위엔 음료수보단 맥주가 더 낫지.’가 나오고, ‘복날인데 뭐가 있어야하는 것 아냐.’의 당위론으로 발전되며, 일터인지 야유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급전된다. 지금은 고용주지만 나중엔 그의 이웃이 될 N은 그 ‘나중’을 생각해 모질어질 수도 없다. 벽돌이 쌓여가는 속도는 이제 어느 음악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디미누엔도와 리타르단도의 극치를 달린다.

 

고민 끝에 N이 테스트를 결심한다. 이들 D,F,G에게 예정에도 없었던 나무껍질 벗기는 일을 시킨다. 변화라면 변화요. 벽돌을 보며 올라가는 혈압을 진정시키기 위한 궁여지책이기도 했다. D 혼자서 통나무 셋을 해치우는 동안 G와 F는 한 조가 되어서도 겨우 통나무 둘의 옷을 벗긴다. 아침 새참 먹으러 갈 때까지 두어 시간 남짓의 결과다. 상식적 계산이 맞는다면 그날 스무 개까지는 아니더라도 열 몇 개의 통나무가 옷을 벗어야 했다. 저녁 때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다듬어진 것은 단 일곱 개.

 

소위 말하는 궂은일에 매달리는 잡부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소위 전문가라 자처하는 목수의 세계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여기에서는 뒷걸음 현상까지도 일어난다. 나무 네 조각 짜 맞춰 창문틀 하나 만드는데 이틀이 걸렸다는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다. 기둥높이가 틀렸다고, 그 기둥 밑에 작은 나무토막을 받쳐놓는 모습은 몬도가네에 다름 아니었다. 그 나무토막 금방 썩어 집이 내려앉거나 기울어질 것은 초등학생도 알 일이다. 그래도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 그 사람이 쉬는 날을 골라, 철근 콘크리트로 주춧돌을 만들어 그 토막들을 바꿔 넣으면서, 그 기둥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던 지난 주 일을 머리에 떠올리며 N은 쓴웃음을 짓는다.

 

어쩌다 한번 일어난 일이라면 소위 최적화를 위한 필요비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이건 수학문제다. 같은 성격의 일을 하는데, X는 나흘에 걸쳐 일을 하고, Y는 이틀 만에 그 일을 마친다면,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 능력자의 두 배의 임금을 받는다는 결론이고, X가 엉터리로 저질러놓은 일을 그 다음날 X와 Y가 다시 뜯어내고, 셋째 날 X,Y가 비로소 제대로 했다면, 그동안 이루어진 일은 X 하루치 분량에 불과하지만 X,Y에게 지불하는 임금은 2x3=6이다.

 

정성들여 계산해 주문한 재료가 떨어져 다시 주문하고 운반해올 때까지의 공사차질로 인한 인력낭비는 또 어쩌고. 손해배상 청구? 하!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를 완전한 혼동의 세계로 빠져들며 N은 공사 중단을 선언한다. 제1막은 결국 N의 항복으로 끝난 셈이다. 그들은 멍한 N을 뒤로한 채 휘파람불며 다른 일터로 옮겨가면 그뿐이니까.

 

대한민국 주식회사. 과연 우리에게 앞날은 있는가? N이 집을 짓는 동안 계속 맴도는 질문이다. 제조업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쓰는 재료는 거의 다 중국이나 미국에서 들여온 것이고, N이 가곤 하는 철물점에선 미련하게 국산 기기를 고집하지 말고, 일제 쓰라고 강권하다시피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양질의 서비스 산업뿐인데, 직업정신이 사라진 우리 사회에서 무슨 서비스 산업이 발을 붙이겠는가. 오호 통재라. 오호 흑흑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