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덕 위 초가 집
성토된 땅은 원래 사계절을 한 바퀴 돌아야 집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굳어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땅이 한번 얼었다 녹고, 비에 흠뻑 젖어봐야 제대로 다져진다는 말이다. 급한 마음에 무거운 포클레인으로 아무리 여러 차례 오가며 애써봐야 그것은 밀가루 반죽을 꾹꾹 누르는 놀이밖에 되질 않는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에 꼭 상징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속까지 잘 다져지려면 보통비가 아니라 큰비가 필요하다. 사실 날씨가 나쁜데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정지작업을 강행한 것도 금년 따라 장마와 겹쳐 꼬리 물고 이어지는 태풍이라는 변수를 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N의 도박정신이 행운을 얻는다. 다행히 성토 후 며칠간 큰 비가 내린다. 태풍을 이리 반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욕할까.
그래도 기초가 약할 것 같은 걱정이 사라지질 않는다. 기초가 없는 곳에도 집을 지을 수 없을까? 물론 그럴 수야 없겠지만, 비슷한 것은 있다. 바로 바닥이 뜬 집. 수많은 파일 위에 상판을 올려놓고 그 위에 지은 집, 그런 집을 이미 여러 차례 보았다. 그래 그거야. N에게 망설임이란 없다. 고물상을 찾아가 단단하고 두터운 녹 쓸지 않는 파일을 잔뜩 실어와, 포클레인 그 주둥이로 때리고 박으며 쑤셔 넣는다. 땅속 어딘가 딱딱한 바닥에 부딪쳐 더 내려가지 못해 들쭉날쭉 남은 부분은 먹줄치고 다시 잘라내어 그 옆에 또 박아 넣는다. 이런 작업을 반복하다보니 서른 개가 넘는 파일 밭이 만들어진다. 이들을 건너질러 철근을 용접하고 거기에 레미콘을 두텁게 부어넣으니 높은 상판 낮은 상판 하나씩 계단모양의 집터가 생겨난다.
성토된 땅 두께보다 훨씬 더 깊이 내려가는 파일박기로 기초는 마련되었는데 아직도 어떤 집을 지어야할지 전혀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다. 일부러 악조건이 되도록 만들고 거기에 맞는 작품 하나 만들어내겠다던 그 호기는 사라졌다. 이 제멋대로 생긴 땅에 아무 집이라도 그려 넣으려 애써보지만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자책감에 시달리던 N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생각의 순서를 바꾸기, 다른 말로 우선순위 정하기다. 방이라면 아래채에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는 어떤 집을 지어야 할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슨 용도의 집을 지어야할까 그에 대한 생각이 우선이다.
문뜩 하나의 아이디어가 N의 머리를 스친다. 그의 고민목록 중 하나가 벽난로였다. 원래 거실에 하나 만들려 했던 것. 전원주택의 벽난로는 일종의 필수적 사치품이라 하겠다.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이 즐길 수 없는 벽난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세상사를 잊을 수 있는 낭만의 상징. 하지만 N은 거실 벽난로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가 여태까지 보아온 것은 바로 거실에 그을음만 가득하게 만드는 천덕꾸러기 벽난로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온돌찜질방을 하나 만들자. 벽난로 아궁이나 찜질방 아궁이나 근본적으로 다를 것 없지 않은가. 불꽃을 보며 상념에 잠길 수도 있고, 고구마나 옥수수 구워 먹을 수도 있고. 그 생각이 들자 또 하나의 고민이 자동적으로 풀린다. 이곳 마을 사람들과 이웃이 되면서 무엇인가 하나 뜻있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찜질방이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 종일 힘든 일에 지친 그들에게 피로를 풀 수 있는 찜질방 하나, 쉬는 방 하나, 그리고 욕실? 스스로 무릎을 치며 감탄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비용문제. 가용비용의 규모가 나와야 집모양이 나올 것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이 나오질 않는다. 아래채에서 아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게임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 판이 끝나봐야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갑자기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변화가 일어난다. 북적거리던 인부들이 C가 새로 맡게 된 새로운 일터로 집단 이동해 버린 것이다. 갑작스런 조용함. 조용한 곳에선 숨은 그림 찾기가 수월해진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나무에 저쪽 한 구석으로 밀려난 낙엽송 더미와 그동안 그렇게 공들여 찍었지만 이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침실에 쌓여 잠들어 있는 그 많은 황토벽돌들! 추가 비용은 무슨 추가 비용. 우선 저 나무랑 벽돌더미를 아예 이쪽 별채 지을 곳으로 옮겨 놓고, 아래채 모양을 상황을 보아가며 바꾸는 것이 더 낫지.
N의 뒤죽박죽 식 집짓기의 또 다른 한 면이다. 마치 동네 슈퍼 아저씨 갑자기 재고조사라도 하듯이 N은 원목, 피죽, 황토벽돌의 숫자를 파악하고, 또 쓰다 남은 굵은 서까래 가는 서까래 개수를 세고 또 세어본다. 부등호가 나온다. 적어도 지금 재고와 위채 소요물량만을 비교할 때 그 부등호는 N의 즉흥적 결정에 유리한 쪽으로 벌어져있다.
이제 미루었던 과제로, 높이가 다른 두 덩어리의 제멋대로 생긴 땅에 집 올리기의 과제로, 돌아온다. 사각형 집 모양으론 땅의 활용도가 너무 떨어진다. 소위 말하는 fill factor 값이 너무 작다. 어떻게 이 ff를 높일 것인가. 사각형 대신 동그라미를 열심히 그린다. 그래도 아직 아니다. 이번엔 비눗방울 그리듯이 겹쳐 넣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리며 끼워 넣다보니, 드디어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값이 나오기 시작한다.
원형이 섞이는 집 구조. 그것은 N이 그렇게 열심히 읽고 읽었던 목심황토방 모양 아닌가. 반갑기는 하지만 이미 접어둔 생각이다. 그래도, 찰주를 올린 원형 황토방? 거기에 마음이 좀 끌린다. 그래, 이렇게 하지. 목심을 진흙 속에 끼워 넣는 그런 황토방이 아니라 단단한 황토벽돌로 채워진 그런 황토방. 서까래가 시원하게 사방으로 뻗어가는 그런 황토방. 드디어 N의 얼굴이 활짝 핀다.
열심히 그리다보니, 꼭 몽골텐트 겔이 꾸겨져 들어간 것 같아 둥근 모양으로 하는 것은 포기. 그 대신 팔각형을 그려본다. 큰 팔각형에 작은 팔각형이 겹쳐지며 ff를 높여간다. 하지만 팔각정이라면 몰라도 벽을 가진 집으로는 문제가 크다. 햇볕 들어올 곳이 많지가 않다는 것. 그렇다고 이 높은 산 그것도 길옆에 사방에 창문을 뚫어놓을 수는 없는 일.
욕심을 줄여, 둥그스름한 방은 낮은 쪽에 하나만 만들고, 높은 쪽 집의 지붕 한쪽을 핀세트로 끌어올리듯 약간 위로 들어본다. 채광이 좋아지며 행글라이더 흉내 내는 종이비행기 모양이 된다. 이 두 집 사이를 잇는 곳엔 작은 사각형 찜질방을 집어넣으니 어느 정도 모양이 나온다. 지붕모양은 근처 도담삼봉을 흉내 내어 학고개삼봉으로 만든다. 한쪽엔 종이비행기 또 다른 한쪽엔 팽이 하나를 받혀주는 조그마한 상투 모양.
남은 과제는 지붕재료. 이쪽에도 너와를 올리는 것은 너무 단조로워 보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마을사람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그 피죽지붕으로 다시 마음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 위한다는 집을 짓겠다고 마음먹은 집인데, 무슨 멋이라도 풍겨 나와야 하지 않을까. 고민 고민 끝에 초가지붕을 올리기로 한다.
비록 아래채 집짓기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채 짓기에서는 이미 겪었던 어려움을 다시 반복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다. N이 결심하고 각오를 다지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다짐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것이 일이 아무리 늦어지더라도 주로 Y의 작업에만 의지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의 비중을 줄이는 방법이다.
별채를 순수하게 자연친화적인 모양으로 지으려니 시작 단계부터 아래채와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진행된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이 팔각정 모양을 변화시킨 열두 개의 기둥을 갖는 둥근 방의 기둥을 어떻게 다듬을까 하는 것이다. 근처에 세워진 팔각정을 찾아가서 이리저리 뜯어보지만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기둥에 올려놓은 들보들이 그냥 못이 박혀있는 힘으로 지탱되고 있는 그런 취약한 모양들이다. 사방이 탁 트여진 정자구조에서야 나중에 보수하는데 어려움이 없겠지만, 황토벽을 입힌 살림집이 될 이곳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기둥과 벽이 나중에 사방으로 떨어져나가지 않게 하려면 이 들보와 기둥들이 서로 물고 있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괘틀기가 여기에서도 통할까? 합판에 그림을 그리고 오려보면서 연구에 열심이던 Y의 얼굴에 희색이 돈다.
그 후 나무 골격을 맞춰나가는 작업이 거의 한 달 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인공주춧돌을 다시 만들고 기둥을 올려놓고 그 위에 들보 엮어가는 과정에서 N은 집짓는 재미의 정수를 느낀다. 원형 방, 종이비행기, 가운데 찜질방 골격이 짜 맞춰지니 파르테논 신전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아니 축대와 어울리는 모양까지 생각하면 아테네 그곳보다 여기가 훨씬 더 낫다. C의 표정도 아주 밝게 빛난다. 아래채는 집이고 이것은 작품이란다. 이제 마이스터의 예언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일까?
- 씌우고 둘러치고
집짓기란 무엇인가. 밝은 공간에 어둠의 장소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이제 이 나무골격에 지붕을 씌우고 벽을 둘러쳐야할 단계가 되었다. 황토벽돌이 젖지 않도록 하려면 당연히 모자 씌우기가 먼저다. 도담삼봉 별명 붙여 학고개 삼봉이란 병아리 집을 만들기로 했지만. 아무리 종이위에 그려봐야 입체적 모양이 살아나질 않는다. 암만 머릿속에 그려봐야 무엇 하겠나. 이번엔 百聞이 不如一見이다.
적당한 위치에 임시로 도리를 세워놓고, 거기에 각목을 걸쳐놓고, 그 위에 보온덮개 씌워가면서, 세 개의 지붕이 그 중심위치 뾰족하기 높낮이 각도 등의 모양에서 어울리는지 검토해 본다. 아찔한 절벽 높은 곳에서 안전망 하나 없이 높은 곳에서 해야 하는 일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원숭이처럼 잽싸게 움직이며 톱질 망치질 하고, 보온덮개 씌우고 벗기기를 반복하는 Y는 우스갯소리 섞어가며 자연스럽게 분위기 잡는데, 가까이서 보았다 마을회관에 올라가서 보았다하며 오가는 N의 손에 오히려 진땀이 촉촉하다. 마음이 점점 약해지는 N은 이제 각도만 대충 맞으면 그만하리라 마음먹지만, 그 목소리에 힘이 빠질수록 오히려 그 인내심의 화신 Y가 더 까다롭게 N의 표정변화를 살피며 “다시! 다시!”를 외친다. 마침 이날 여기 들른 N의 가족들은 그 아들/오빠/아빠/삼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아래채에 쓰고 남은 서까래 다 동원해보니, 몇 달 동안 여기저기 굴려져 비 맞은 탓에 사방에 곰팡이가 피어있다. D가 급히 작업대를 만들자 P와 F가 즉시 그라인더 작업을 시작한다. 뽀얗게 날리는 나무가루에 두 사람은 금방 눈사람 꼴이 된다. 이 P의 적극성을 어느 남자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비싼 돈 내면서 살 빼러 다니는 사람보다 일하는 자기가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다며 명랑하게 웃어넘긴다. N이 집 짓는 동안 누구누구에게 이런 때 실망을 느꼈다고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절대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P가 그 사람일 것이라 고마워한다.
찰주에 서까래 끼어 올리는 작업이 계속된다.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동그란 지우개에 꽂아 넣는 모양이라고나 할까. N은 이 스물여섯 개의 서까래가 찰주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방바닥에서 올려보고 있는 자신을 속으로 그려보며 미소 짓는다.
하지만 미스터 머피가 이때를 놓칠 리 있겠는가. 며칠만 기다렸다 왔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 심술궂은 비가 때맞춰 내린다. 갈고 닦은 서까래가 다 흉한 몰골이 되지 않게 하려 작업을 중단하고 비닐을 씌운다. 이 작업이야말로 정말 곡예 중 곡예다. N은 계속 조심을 소리치고, Y는 어린아이 놀리듯 미끄러움 즐기며 오르내린다. 이런 것이 바로 아찔함의 극치 아닌가.
N은 다시 한 번 황토벽돌 더미를 둘러본다. 모든 벽을 30센티 두께로 쌓고 싶으나 아무리 벽돌 장 수를 계산하여도 모자란다. 어차피 여기에 맞춰 찍은 것이 아니라 아래채 거실 벽에 쓰려했던 것이니 그 숫자가 맞아떨어질 리 없다. 급한 김에 황토벽돌을 구해볼까 다시 한 번 벽돌공장에 가보지만, 역시 이건 아닌데 라는 실망뿐이다. 계산에 계산을 거듭한 끝에 찜질방 벽체만 세로 두께로 놓고, 나머지 외벽은 가로 두께로 놓기로 마음을 정한다. 물론 욕실 외벽은 시멘트 벽돌로 처리하여 그 소요수량을 최소화한다.
이제 벽돌을 쌓을 차례다. 아래채 때 그 전문가 R을 다시 부를까 생각도 해보지만, 지난 번 본채의 그 엄청난 실수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마음이 선뜻 내키질 않는다. 며칠 신중하게 알아보니, 저 앞집 지을 때의 그 조적형제 Q를 C가 추천한다. 이 일대 유명한 전문가란다. 그들도 황토벽돌을 쌓은 경험이 있을까 물어나 본다. 물론이란다. 이번엔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조적형제 Q. 정말로 훌륭하고 용감하다고 밖에 달리 어찌 표현하겠나. 일하는 방법엔 자신감이 넘치고 형제의 움직임은 효율성 그 자체다. 그에게 일을 부탁할 사람들이 줄 서 있다는 것이 과장이 아니었구나. N은 그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다. 오죽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N이 스스로 부탁해 그들의 집에까지 갔었겠는가.
오늘도 또 몸이 좋지 않아 못나온다는 P와 Q의 연락을 받을 때마다 몸 사리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그들에게 충고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저 남보다 조금만 더 성실하게 하면서 자신의 몸도 살피는 것이 좋을 듯싶다고. 그들의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이제 N이 확실히 느낀다. 며칠 그들의 일을 거들어주다가 인대란 인대는 다 늘어져버려서 아이고 죽겠구나만 연발한다.
- 지하수
무인도와 유인도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사람이 살 수 있는 물이 나오면 그곳은 유인도요, 아무리 섬이 커도 샘물이 없으면 그곳은 무인도가 될 수밖에. 마시는 것도 물이지만, 생활하는데도 물이고, 집 짓는데도 역시 물이다. 불이야 없어도 좀 불편하게 살면 그만이지만, 물이 없으면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집짓는 내내 이 물이 말썽이다. 처음 포클레인 작업할 때 마을의 오폐수 공사가 있어 거기에 덤으로 급수관을 묻으려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 간단한 작업이 거부되었다. 이미 땅을 파 놓은 곳에 엑셀파이프 하나 더 옆으로 묻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 가볍게 생각도 해보고, 별도의 사례금도 제안했지만, 그 거부는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했다.
견디다 못해 N은 지하수를 파기로 한다. 원래 지하수 파는 것은 물이 나올 때까지의 비용을 업자가 자담하고, 성공하면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선 물을 얻는 것이 급한 N에게 그런 관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계약금조로 선수금을 지불하고 공사를 부탁한다.
큰 덩치의 장비가 속속 들어오는 날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혼자 결정하면 어떡하느냐며, 다들 고생할 때 혼자만 나 몰라라 하는 것은 공동생활에서 용납될 수 없는 개인주의라며, 당장 계약을 취소하라 압박해 들어온다. 그 말의 뒤에 어떤 계산이 깔려있는지 모를 리 없는 N은 반론을 들이댄다. 나 혼자 쓰려 이 샘물을 파겠느냐. 마을에 물이 모자랄 때 이 물을 쓰면 그게 더 좋은 것 아니겠느냐.
N이 여기나 여기에 샘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위치를 지정해주지만, 다음 날 업자가 파는 곳은 엉뚱한 위치다. 왜 이곳이냐 물으니, 어제 수맥 탐지 도구로 짚어보니 바로 이 자리었단다. 땅을 파 들어가는데, 계속 돌가루만 나온다. 거대한 바위를 뚫고 있는 모양이다. 벌써 100 미터를 훨씬 넘었는데도 그냥 계속 돌가루다. 이제 허탕이면 어쩌지. N의 속은 타들어가지만, 업자의 표정은 느긋하다. 틀림없이 이 자리에서 어제 수맥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미 150m 들어갔는데도 소식이 없다. 이제 절망인가. 업자는 여전히 태연. 160m 드디어 물이 나온다. 업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인데, 전혀 기뻐하는 모양이 아니다. 오래된 직업의식?
며칠 후 그곳에 관정파이프가 박히고, 다시 며칠 후 모터업자가 수중펌프를 내린다. 물이 나온다. 시원하게 뿜어져 나온다. 잔치를 벌여야하는 것 아니냐 그 사람이 묻지만, N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고, 그럴 흥이 나질 않는다. 뿌연 돌가루 물도 퍼 낼 겸 수량도 확인할 겸, 이후 며칠 동안 N은 스톱워치 손에 들고 드럼통에 물을 받으며 테스트를 계속한다. 나오다 끊겼다 하는 것으로 계산을 해보니, 계약된 양의 1/4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나마 나오는 게 어딘가. 최소한 물이라는 것을 쓸 수 있지 않은가.
며칠 후 그 지하수 물이 끊긴다. 바닥이 고갈되어 그럴 것이라는 설명이다. 마을 저 아래 집도 그랬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런 낭패가. 지하수 업자에게 연락을 해보지만 바쁘단다. 계속 며칠 후 오겠다는 답인데, 그 며칠이 몇 달 동안 계속된다. 이럴 수는 없는 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업자 그럴 수밖에 없겠다. 지금까지 공사는 그 선수금으로 진행했고, 지하수 파던 날 물 나오는 모양을 보니 계약된 하루 20톤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고, 따라서 이제부터 더 이상 들어가는 비용은 그냥 날리는 것이 될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그날 그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었던 것이로구나.
이런 낭패가. N의 자존심이 발동한다. 그럴 리는 없다. 지하수라는 것이 어디 바위사이에 고여 있던 물을 퍼내는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땅 속의 개울로부터 물을 퍼 올리는 것인데, 그렇게 쉽게 고갈될 수 있겠는가. 이리저리 만지며 안간힘 써보는 N의 모습 애처롭기 짝이 없다. 그가 이토록 신경을 쓰며 매달리는 것은, 이 물 문제 해결에 N의 마을생활의 미래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미 N이, 또 심지어는 그의 다른 반쪽이, 물 가진 자들로부터 모욕을 당한 것이 몇 번이었나. 그런 모욕의 기미는 또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독립만세의 외침만으론 아무 의미가 없다. 실제로 독립능력이 있는가하는 그것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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