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개솔숲 이야기

Flintstones, 匕首, 병 주고 약 기대하기

뚝틀이 2010. 2. 25. 08:44

- Flintstones

 

이제 비가와도 걱정이 없게 되었으니, 그 동안 구상해두었던 각종 방문과 창문의 구체적 설계에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어디에는 한옥분위기를 살려 살문을 달고, 어디에는 시원한 전망이 살아나도록 산뜻한 섀시를 달고...

모양설계라는 것은 모양뿐 아니라 비용을 미리 뽑는 작업이기도 하다. 낭만이 들어갈수록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인부들만 아니라 납품업자들도 외지인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창틀과 섀시 작업에 요구하는 액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나 높다. 약간 높은 것이 아니라 몇 배나. 너무 넘겨짚는 것은 아닐까 몰라도 담합 의혹이 짙다. 서울 쪽의 업자를 알아도 보지만, 소규모 공사에 출장 작업까지는 생각이 없단다. 결국 N이 굴복해야하는가.

 

전화위복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기본은 무엇인가. 산뜻함과 섬세함보다는 투박함. 그것이 이 집의 특징이어야 한다. 여기 주변에 어울리는 모양은 인간의 섬세함보다는 자연과의 어우러짐이다. 고인돌 가족 플린트스톤의 집까지는 아니더라도 투박하고 제멋대로 생긴 나무로 문틀이랑 창문틀을 만들자. 거기에 유리를 어떻게 끼울 것인가 하는 걱정은 나중일이다. C는 언제나 변함없이 진취적이고, Y의 얼굴에도 희색이 감돈다.

 

고인돌 가족에게는 그들 집이 가장 짓기 편한 집이었을 테지만, 모든 것이 표준화된 현대 사회에선 그런 제멋대로의 모양이 들어설 곳이 없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도움이 되는 정보를 구할 수가 없다. 발로 뛰기. 이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 제재소 저 목재상에 알아보고 또 알아본다.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원목을 취급하는 사람들은 대개 솔직하다는 것. 생김새도 그렇고, 크기도 그런 원목을 다루다보면 품성이 절로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어느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어도 마음이 편하다. 여러 곳 접촉하다 결론은 얻는다.

 

원목을 통째로 구입해, 문틀 용도로 중심에서 넓은 판재를 건져내고, 그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가로가 또는 세로가 잘려나간 나머지를 벽체를 입히는 용도로 함께 들여오는 방법, 그것이 최적이었다. 그런 용도로 견적을 얻어 보니 값이 몇 퍼센트가 아니라 역시 반값이니 배니 그런 차이가 난다. 그래 고인돌 가족이 와서 봐도 살고 싶어지도록 모든 문틀과 창틀에 원목 분위기를 살리는 거야.

 

독일 말에 Schnappsidee 소주아이디어라는 말이 있다. 소주 한잔 걸치면 대충 떠오르는 그런 생각인데, 맑은 정신으로 돌아와 다시 검토해보면 전혀 말도 되지 않는 그런 생각이라는 뜻이다. 그래? N은 C와 Y의 의견을 물으며 그들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핀다. 역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둘의 얼굴엔 미소가 넘친다.

 

이제 스케일 자체가 바뀐다. 폭 6미터 높이 3미터 거실 벽 양쪽이 나무와 유리로 덮이게 되고, 나머지 방들도 온통 유리로 덮이게 될 것이다. 어쨌든 주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목재상을 새로 차리기나 한 것처럼 각종 모양과 길이의 나무더미가 곳곳에 쌓였고, 집 안은 갑자기 목공소로 바뀐다.

 

- 匕首

 

비록 중간과정 모습이라 하지만, 아직 흉하게 그 모습을 길 쪽으로 드러내고 있는 레미콘 덩어리.

사람의 마음이란 항상 그런 것 아닌가. 이곳에 레미콘 집을 짓는다는 것은 거의 죄악이라는 생각에 그 벽을 통나무 분위기로 덮어씌우며 일종의 창작품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했지만, 시간이 자꾸 늦춰지면서 이 씌우기조차 일종의 속임수로 생각할 될 만큼 N의 강박관념은 일종의 결벽증 수준에까지 이른다. 속임수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라면 이제 그 속임수를 쓴다는 사실이 더 알려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이 고깃덩어리에 옷을 입혀야 마음이라도 편해질 것이다.

 

그 정도로 마음이 불편하고 조급해지는데도 그 일을 자꾸 늦추고 있는 것은 그 어느 전문가의 의견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진 모양의 형상물이 집 모양을 정말 이상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 때문이 아니다.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서는 목수를 전혀 구할 수가 없다는 그런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아무나 불러 그렇게 해달라고 하면 되기는 된다. 하지만 성의 없는 일로부터 어떤 품질의 일이 나오는가를 이미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는 N이기에 그대로 밀고나갈 수만도 없는 일이다. 사실 이미 강요 반 설득 반으로 일을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몇 가닥 붙여보지도 못하고 일이 중단된 상태이기도 하다. 물론 목수 Y야말로 적임자지만, 그에겐 이미 더 중요한 창문 쪽 일을 부탁해놓은 상태이다.

 

꼭 설계에 새 아이디어를 넣는 것만이 발상의 전환이던가. N은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낸다. 일할 사람이 없다면 스스로 일하는 것. 그렇지만 혼자 일하기 벅차다면 같이 일할 사람을 찾는 것.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협조가 없으면 스스로가 전문가임을 자처하고, 도움을 줄 사람을 찾을 것. 만일 그렇게 하는 것에 자신이 서지 않으면, 전문가를 키우고 자신은 자기의 개성을 살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것.

 

그런 생각에 N은 지금까지 남의 조수역할만 해오던 D를 지목하고 그를 집요하게 설득한다. 사실 이 일에 어려운 점이 무엇 있겠나. 단지 누구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일일 뿐이지. D가 그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둘의 호흡이 맞기까지엔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에는 사랑이 들어있었고, 완벽을 향한 애정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의 수준급 솜씨 덕분에, 막혔던 일이 순순히 풀리기 시작한다. D와 N이 함께 해나가는 작업속도도 D와 X가 했던 그 속도보다도 훨씬 빠르니 이것이야말로 금상첨화 아니던가.

 

영화나 소설에 쾌재를 부르는 주인공이 섣부른 자만에 불의의 일격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인재 발굴이라는 보람 있는 일이요 집짓기 시작한 이후 최대의 브레이크스루라고 흐뭇해하던 N에게 비수가 꽂힌다. D가 자기는 되는 게 없다며 자포자기 상태에서 이제 더 일을 못하겠음을 선포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제 이곳에서 자기가 할 일은 더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며 사라진다. 결별.

 

N이 비통한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그렇게도 큰 성취라고 느꼈던 이 과정이 D에게 그렇게도 가혹하게 스트레스와 고통만을 안겨주었던 것인가? 내 여태까지 그런 식의 자기도취 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었던가? 일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도 못했던 N 자신이 자꾸자꾸 불쌍하게 느껴진다.

 

- 병 주고 약 기대하기

 

이제 그동안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있던 일을 시작할 단계가 되었다. ‘두 개 다 짓죠 뭐.’ 하던 측량설계 사무소 소장의 권유를 따를 땐 사실 나중에 둘 중 한쪽 편한 쪽만 진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넓은 땅을 잡아놓고,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얻고, 여기가 바로 ‘그’ 위치로구나 곳을 발견하고, 거기에 가장 어울리는 집을 지은 다음 나머지 땅에 대해 얻은 허가를 취소 받는 그런 가능성. 하지만 그런 편법이 가능하다면 그 누가 이런 방법을 마다하겠는가. 신청한대로 짓든지, 처음부터 새로 신청하든지 둘 중에 하나, 이것이 뒤늦게 접한 담당공무원의 유권해석이다.

 

온갖 정성을 지금 짓고 있는 집에다 쏟아붓다보니 두 번째 집에 알맞은 땅이 남질 않았다. 또 하나의 악조건이 기다리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초기허락에 따르면 정작 N이 집을 지으려 신청했던 곳이 아닌 움푹 들어간 구석에다 집을 집어넣어야한다는 요구조건에 맞추어야한다는 비극적 현실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치명타가 겹친다. 측량의 오류로 집 지을 수 있는 폭이 4m나 줄어들은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던 요행심리에 기대었던 N은 난감해진다. 이제 기댈 곳은 하나뿐. 또 하나의 어떻게 되겠지. 이번에는 요행심리가 아니라 전화위복에 대한 기대감에서다.

 

N은 모험을 결심한다.

집짓기 힘든 곳일수록 집 모양이 더 아름다워진다는 그 마이스터 선생님의 말씀이 맞는지를 테스트해보려,

이번엔 아예 N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다.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그것과는 상관없이 튼튼한 기초를 쌓는 것이 우선이다. 거기서 나온 모양에 집을 맞추자.

 

생각지도 않은 일에 N이 당황한다. 오래전부터 미리 예약을 해 둔 포클레인 기사에게 당일 확인 전화를 걸었더니 딴 곳에 일이 있어서 올 수가 없단다. 아주 솔직히 이야기한다. 이쪽 일보다는 그쪽 일이 더 오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쪽을 택했다고. 본능적 이해관계 계산에 따른 행동이다.

 

건설현장이란 세상에서는 약속이니 의무이행이니 그런 것 다 거추장스러운 개념일 뿐이다. 어디 이런 식의 반응을 한두 번 겪었던가. 하지만, N의 붉어진 얼굴에 제 색깔이 돌아오기 전에 그쪽에서 전화가 온다. 혹, 아직 다른 사람 구하지 않았다면 자기가 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어안이 벙벙해진 N이 묻는다. 그럼 방금 전 그 이야기는 어찌 된 거냐고. 그쪽 일은 딴 사람이 하게 되었다는 그의 대답이다.

 

뛰는 뭐 위에 나는 뭐 있다는 속담. 이젠 모럴 애티튜드 그런 것 따질 정도의 순진한 N이 아니다. 어서 오기나하세요 간단히 대답한다. 현장에 나타난 그와 멋쩍은 웃음 한 번 나누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여기까지 축대를 쌓는데, 그 폭과 높이가 어떻게 될지는 마음대로 하세요. 중요한 것 딱 하나만 지키세요. 절대로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쌓아야 한다는 그것 하나.

 

갈수록 가관이다. 첫날은 에어컨 고장 났다고 사람 불러 수리하고, 둘째 날은 비가 온다고 처마 밑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잡담이나 나누고. 식사와 새참시간 빼면 시간당 10만원 꼴로 지불해야하는 N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이번엔 머피의 법칙까지 끼어든다. 한밤중에 시작한 태풍비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집안에 쌓아둔 자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일을 당겼어도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텐데. 가정법이 무슨 소용인가. 이건 비상사태 그 자체다. 밤새 플래시 불빛 하나에 의지해 눈썰매장 모양으로 나무통도 만들고 땅을 파가면서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을 집밖 저 멀리로 돌리는 배수로공사에 매달린다. 새벽녘 N은 狂人의 모습이다. 그때 나타난 포클레인 기사. 미안하다, 안됐다, 어쨌든 무슨 말 한 마디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 일 없었고, 아무 것도 못 보았다는 듯이 그냥 태평스레 포클레인을 끌고 가버린다. 끊어질 듯 아픈 건 허리뿐이 아니다. 하늘을 찌르는 분노를 참는 것은 그보다 더한 아픔이다.

 

어쨌든 오랜 시간이 지난다음 그 축대일은 끝이 나고, 평평한 땅 열댓 평을 얻는다. N이 필요로 하는 면적에 겨우 한 평 더 얹은, 여유라곤 거의 없는 크기다. 그것도 집짓기 편한 사각형 모양이 아니라, 비스듬히 경사진 제멋대로의 모양이다. 이제 N 스스로 자초한 두 가지 악조건이 만들어진 셈이다. 약한 기초와 제멋대로 생긴 땅. 여기에도 전화위복이 가능할 것인가? 어디, 그 마이스터도 감탄할만한 작품을 한 번 만들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