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매? 아니! 살다보니 어쩌다 그냥 여기 모인 사이.
웬 세 마리. 시골 마당에 개 몇 마리면 어때! 원한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들여올 수도 있는데.
웬 뚝뚝뚝. N이 키우는 개 이름은 언제나 뚝뚝이였지. 이번엔 세 마리나 되니 어쩔 수 없어 뚝자 돌림이 된 것이고.
사람 나이 일곱이 개 한 살이라는 말에 따라 나이를 따지면, 뚝디는 여덟, 뚝뚝인 일곱, 뚝틀인 이제 겨우 한 살.
N의 집짓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즈음, 이젠 친구사이처럼 되어버린 Y가 선물을 가져왔단다. 진돗개란다. 이곳 진돗개 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에게서 온 선물이니 틀림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문자 그대로의 오물범벅 강아지. 싸고 토하고 흘리고. 하긴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르릉 빙글빙글 덜컹덜컹을 겪었으니 그 공포가 오죽했으랴.
부랴부랴 세 들어있는 마을회관 이층으로 데려가 깨끗이 목욕시키니 백설공주가 따로 없다. 저녁에 일이 다 끝난 다음 저녁밥 만드는 일일랑 제쳐놓고, N과 이 백설공주의 첫 번 데이트. 아장아장 걸음마로 마을 안쪽을 한 바퀴 휘도는데, 이렇게 귀여울 수가. 급한 대로 라면박스 하나 얻어와, 항상 눈이 마주칠 수 있도록 현관안쪽에 들여놓는다.
이 녀석 덕에 아침저녁으로 산보길이 즐겁다. 가끔 선보이는 ‘고양이 뜀’에, 또 ‘까꿍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느 날 N이 낮잠을 자다가 무엇인가 물컹하고 잡히는 느낌에 소스라쳐 깨어보니, 이 뚝디 그의 옆에서 마치 진짜 백설공주라도 되는 양 네 활개 펴고 자고 있는 것 아닌가. 아! 이 행복.
뚝디가 온 두 달 후 둘째를 데려온다. 이번엔 N이 직접 Y회장 댁에 가서 데려온다. 아니, 조심조심 모셔온다. 하지만 어쩌랴.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오물범벅. 아무리 창문을 열고 빠져라 빠져 해도, 그 역한 냄새에 금방이라도 으윽 할 것만 같다. 도착 즉시 깨끗이 목욕시키니 이 뚝뚝이. 어린왕자다. 약간 누런 기운 감도는 흰 옷을 걸친 어린왕자.
왕자와 공주의 상견례. 서로 킁킁거리다가, 꼬리 살랑살랑 흔들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아직 젖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는 이 녀석. 밖에 내놓은 대얏물이 벌써 꽁꽁 얼어버리는 이 산골의 초겨울에 저 라면상자 속에서 견딜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은 내 방에서 재워야할지도 모르지. N이 은근히 걱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한갓 기우. 하도 조용해 가만히 들여다보니, 누나 품속에서 새근새근 잘도 잔다.
누나의 극진한 사랑에 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수놈들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일까. 먹이 때만 됐다하면, 이 꼬마 왕자 뚝뚝이가 으르르릉거리는 통에 뚝디는 뒷걸음질이다. 이 녀석 먹는 것 하나 게걸스럽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어느 새 두 녀석 덩치가 비슷해진다.
하루 종일 온 동네 휘젓고 다니는 이 뚝 남매에게 N 고유의 휘파람 훈련이 시작된다. ‘휘이~ 휫’ 소리에 먼저 달려오는 녀석에게는 맛있는 멸치 한 토막 주기. 물론 2등에겐 국물도 없다. 어디서 놀다 누가 먼저 출발했든 그런 것 상관없다. 철저한 선착순. 마라톤에선 누구나 동시에 출발해야하지만, 생존경쟁에선 그런 것 따지지 않는다. 누가 먼저 도착하나 그것만이 중요하다.
누나의 날렵함을 당할 재간이 없어, 번번이 허탕 치는 뚝뚝이. 아무리 애처로운 눈으로 껌벅껌벅 쳐다봐도, ‘억울하면 다음번엔 잘 해!’
덕분에 N이 현관문만 나설 땐, 휘파람 있건 없건, 뚝뚝이가 먼저 달려와 옆을 졸졸 따른다.
약골 뚝디.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가. 그 쇠한 몸에 약한 몸에 무슨 병까지 들었는지, 이제 먹이까지 포기한다. 그 좋아하던 산책길에 나서자 해도 그냥 눈만 껌벅껌벅.
‘그래 얘야.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렴.’
양지바른 곳 짚더미 위에 조용히 자리 잡고 눈을 감는다. 꼭 ‘그동안 고마웠어요.’하는 그런 불길한 느낌.
온돌 불 지피는 동안, N의 집사람은 연신 애원조로 속삭이다.
‘얘야. 우리 뚝디. 어떻게 기운 좀 내봐.’
N도, 이 뚝디를 데려오던 날 그를 위해 만들어, 항상 불러주던 그 노래를 계속한다.
‘뚝디 까꿍♪ 뚝디 까꿍♪♪’
뚝디의 숨결은 점점 약해진다.
어느 순간. 눈을 믿을 수 없다는 게 이런 것일까. 뚝디의 목이 갑자기 뒤로 푹 꺾인다.
딸도 집사람도 N도 일순 숨이 탁 막힌다.
‘아냐! 아직 숨이 붙어있어! 어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신비의 마법 황토바닥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본다. 숨이 그쳤는지 아직 남아 있는지, 방바닥 온기인지 뚝디의 체온인지.
세 식구 숨을 죽이고 뚝디 옆을 지킨다. 얼마나 잤을까. 잠깐이라 생각을 했는데, 벌써 날이 밝아온다. 가만히 내려다본다. 녀석이 눈을 뜬다.
‘살았다. 살았어. 살아났어!’
겨우 우유만 넘기는 날이 계속되며, 이 녀석 원기를 찾아나간다.
회복기념 산행. 휘파람 간식 놀이를 반복하며 높이높이 올라간다. 저 앞으로 달려갔다 돌아오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고. 이렇게 좋을 수가. 이제 다시 아주 살아난 모양이다.
마을이, N의 집이, 저 밑에 내려다보인다. 한참을 쉬다.
‘자! 가자!’
이때가 이 두 녀석에게 제일 즐거운 순간이다. 올라갈 때는 주인이 어디까지 갈지 몰라 근처를 맴돌아야했지만, ‘이제 우리끼리 가도 되죠’ 이런 식으로 앞서서 달린다. 온 몸이 흙투성이. 어떤 때는 발톱과 입술에 핏자국까지 보인다.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건지. 뚝디가 뚝뚝이에게 경고 신호를 보낸다.
‘내 먹이 넘보지 마.’
엄연히 자기 것이 따로 있는데 뚝뚝이 것도 자기 몫이라 이거다.
‘웃기는 소리.’
어린왕자가 아랑곳 않고 먹이에 입을 대려는 순간. 갑자기 백설공주가 그리로 달려간다. 그 큰 덩치를 한숨에 쓰러드리고, 사납게, 아주 사납게 물어뜯는다. 불쌍하게 깨갱 소리 쏟아내던 어린왕자 결국 온 몸이 피투성이다.
이제 한 술 더 뜬다. 그 왕자 불쌍해 보여 몰래 따로 뭘 주면, 이 공주 그 왕자의 코에 킁킁거리다, 또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난리는 계속된다.
‘그동안 내 삶에 의욕이 없어 다 참아줬지만, 이제는 달라. 임마.’
뭐 이런 것인가.
이젠 둘에게 따로 먹이를 줘도, 그 불쌍한 뚝뚝이 가끔 힐끗힐끗 쳐다보는 뚝디가 무서워 아예 먼 산만 본다가, 누나가 자기 그릇에서 뒤로 물러선 다음에서야 비로소 슬슬 앞으로 나온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야.’ 웬만하면 싸움을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육중함과 민첩함의 서열다툼에 끝이 없다. 새벽 산책 기분 좋게 끝내고, 집 울타리에 들어서는 순간, 두 녀석 고개를 앞으로 숙여 내리고, 투우 못지않은 콧김을 불어내다가 갑자기 용호상박 혈투를 벌인다. 벌써 몇 번째인가. 이러다가 한 놈 어떻게 되겠네.
하지만 일단 누가 더 센지 서열이 정해지고나면 서로 없인 못사는 연인 사이다. 이해 못 할 정도다. 한 마리는 위쪽 입구에, 다른 한 마리는 아래쪽 입구에 따로 떼어놨다간 -사실 이렇게 해야 자기본분 아닌가. 상전 모시는 것도 아니고, 이거야 원- 난리가 난다. 세상 무슨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 서로 울부짖는데, 가끔 늑대소리로 들릴 정도다.
이거 원 동네에 미안해서. 미우나 고우나 한 몸 한 마음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
궁리궁리를 하다가 N이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린다.
‘이 두 녀석 떼어놓기는 이미 글렀으니, 한 마리를 새로 데려와 위쪽 문을 맡기자.’
여기저기 알아보니 새로 된 진돗개 협회 회장에게 마침 블랙 탄 한 마리가 있단다. 망설일 것 무에 있나.
이번엔 토하고 어쩌고 그런 것 없도록, 아예 차 앞자리에 편안한 귀빈석을 준비해 놓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꺼먹돼지보다 더 새까만 털에, 눈 위 흰 점이 선명하게 자리한, 귀여운 네눈박이.
무조건 실어온다. 목욕을 시키고, 진딧물 약 발라주고, 가꾸고 나니, 귀여운 흑기사다.
태어난 지 40일 밖에 안 되어서 뒤뚱뒤뚱 걷는 것조차 힘들어보인다.
이 새로운 아기 흑기사 뚝틀이를 형과 누나에게 소개시킨다.
‘얜 누군데요?’ 뚝디가 신기한 듯 거리를 두고 들여다본다.
‘뭐 이런 게 있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뚝뚝이가 시큰둥해서 킁킁 거린다.
하룻강아지 뭐 무서운 줄 모르고, 이 흑기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자, 큰 녀석들이 이리저리 피하느라 정신이 없다.
뚝틀이를 무릎에 앉히고 우유와 아기먹이 주던 N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뚝뚝이에게도 작은 덩어리 하나 넘긴다. 그러자 이 새 꼬마가 ‘그건 뭔데요.’하며 그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 순간! 일이 벌어진다. 그 큰 덩치 뚝뚝이가 N이 안고 있던 꼬마 뚝틀이를 순식간에 물어뜯는다. 정말 이 ‘눈 깜짝할 사이’에 N도 손을 쓰지 못한다.
그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아기에게 소독약을 발라주며, 진돗개 책 한 구절을 생각한다.
‘아무리 충견이라도 야생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라.’
N이 새벽산보를 나간다. 어린왕자. 백설공주. 흑기사를 데리고. 그 사이 친해진 공주와 기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물어뜯는 시늉까지 내가며 신나한다. 굵은 줄에 매인 왕자는 상념에 잠긴 듯 땅만 보며 걷다가, 영역표시에 바쁘다.
N은 느낀다. 뚝틀이의 날카로운 발톱. 벌써 느낄 수 있는 그의 물어뜯는 힘. 몸통에 비해 육중할 정도로 느껴지는 그 앞다리와 뒷다리의 모양과 크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골격. 이들 모두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N은 믿는다. 이제 언젠가 이 녀석이 커지면, 그 귀신 보는 것 같은 내성적 앙칼쟁이 누나와, 생각 없이 힘만 센 단순쟁이 이 형과, 공포의 삼남매를 이루어 이 ‘학고개 솔숲 이야기’를 든든히 지켜 주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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