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의 생각세계

대안은 있는가.

뚝틀이 2010. 2. 26. 00:16

우선, 아주 짧은 이야기 하나. 미국을 두 명의 대학생이 세웠다는 이야기.

왕실과 종교가 한통속 되어 모든 게 썩어문드러지던 그 시절, 영국의 젊은 대학생 둘이서 서로 약속을 했다고 한다.

“힘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에 있겠나. 그저 너하고 나만이라도 바르게 살자꾸나.”

그 둘의 모습을 보며, 나도 나도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그 '바르게살기'는 캠퍼스 밖으로도 퍼져나갔다고 한다.

기득권세력은 이 ‘청교도운동’을 자신들에 대한 반발로 받아들이고, 이 ‘위험분자들’을 무자비하게 다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혹독한 탄압을 견딜 수 없게 된 이 ‘착한 사람들’은 메이플라워호로 영국을 탈출해 '신세계'로 향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라도 있나 아무리 인터넷 뒤져봐도 '고증'을 발견할 수 없으니, 그저 믿거나 말거나 차원의 이야기.)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져도 맑은 샘물구실을 하는 세 곳이 있다고. 바로 종교와 대학과 언론.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볼 때, 이 세 곳이 하나같이 그 옛날 그 영국 그 꼴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 자신이 원하는 것만 기도하기에 바빠 이웃사랑은 립서비스일 뿐인 교인들과 교세확장에만 열을 올리는 교회들

- 권력-부-명예 연결고리에 동참할 준비 오직 거기에만 관심 쏟는 대학생들과 기득권 지키기에 바쁜 속물대학들

- 사회의 거울이라는 사명감은커녕 집단적 사견의 노예가 되어 궤변 뱉어내기가 일상화되어있는 편향된 언론들

극히 일부 현상을 과장해서 일반화시키고 있다고? 아니다. 내 생각엔 아니다. 너무나도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사회 곳곳이 악의 세력에 깊숙이 점령당해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본질과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왕따’당하고 ‘은따’당하며 바보취급 받는 우리사회의 현실을 달리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지금 그 흔해빠진 비난시리즈를 계속하려 함이 아니다.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회모습을 만든 당사자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고, 또 무엇보다 나 자신인데. 단지 내가 이제 그 ‘두 학생’의 입장이 된다면 어디에서 ‘첫 단추’를 찾을까 생각해보려는 전 단계로서의 생각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첫 단추는?

 

개혁? 혁명은 가능해도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역사적 진리는 우리도 이미 수 없이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날그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의 힘에 의지하는 집단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가진 자들의 지능적 발악을 이길 수는 없다. 하물며 하나의 작은 새일 뿐인 내 힘으로 할 일이 어디 있겠나.

 

그 두 학생처럼, 세상과는 상관없이, 혹은 세상과 담 쌓고, 그냥 나 홀로 바르게살기? 힘들지만 여태까지 그렇게 살려 애써왔다. 나름대로 애를 써왔다. 하지만 지금 시대상황을 볼 때 그건 너무 피동적이다.

 

간디처럼, 기득권층에 항거하는 능동적 무저항운동에 앞장서기?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몰라도, 지금 그것이 무슨 호응을 얻겠는가. 사실은 지금 우리가 그 동물농장의 그 돼지들보다도 더 비참한 꼴이 되어있는데도 그걸 느끼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발 불기라도? 그것은 정치인들의 몫이다. 아니, 사실은 국민 몫인데, 우리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선 정치인이란 직업꾼들이 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자기들끼리 즐기는 그 난장판 게임에, 사심 없는 일반인들이 끼어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어쩐다?

다른 방향으로 나에게 물어본다. 작은새 네가 행복을 느꼈던 적은 언제였나. 그런 때가 있기는 있었나?

 

있었다. 몇 번 있었다. 아침신문을 끊었을 때가 그중 하나였다. 아침마다 오장육부를 뒤틀어놓는 그 ‘비난을 위한 비난’을 읽지 않게 되니 마음이 편해졌었다. 신문을 읽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만큼은 알 수 있었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또 있었다. 다니던 교회에 발을 끊었을 때. 물론 처음에는 몹시 허전했다. 하지만, 그 허전함이 만나던 사람들과의 헤어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아주 잘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교회가 사교클럽은 아니지 않은가. 집에서도 성경은 읽을 수 있었고, 기도도 할 수 있었다.

또 있었다. 아주 여러 번. 바로 책을 읽을 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화다. 비록 상대방과 육성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니자만, 그래도 난 행복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그런 대화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곤 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지만 답은 결국 하나다. 비난과 욕심의 세계를 떠나, 나의 내공을 쌓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

비판으로 시작해서 비판으로 끝나는 세계는 의미가 없다. 그런 세계는 욕설과 저주의 세계와 다를 바 없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카타르시스 효과뿐이다. 불행히도 우리사회는 여태까지 그래왔다. 길을 제시하는 역할은 간데없고, 어느 한 계층의 관점에 서서 편 가르기에만 열을 올리는 언론매체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공동의 적’을 향하여 던지는 조롱과 저주가 난무하고, 박수소리 요란한 인터넷 세계에서의 ‘토론광장’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것 하나도 없다. 이런 모양만 계속되는 사회엔 희망이 없다.

 

작용과 반작용만이 난무하는 ‘무뇌화 사회에의 나락’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다. 대안제시 그것이 핵심이다.

대안이란 무엇인가. 문제에 대한 고민을 능동적으로 함께 함이다. 대안은 그 비판대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함이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내공이 필수적이다.

 

그런 ‘흐리멍덩한 방법’이 그래 ‘방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냐고? 그렇다. 그 두 학생 입장에서의 첫 단추라고 하지 않았나. 마치 한 두 사람이 시작하여 사회전체가 바뀌고 역사가 바뀌듯.

사회구성원 각자가 '생각의 깊이'라는 ‘내공’을 쌓고, 겨룸과 겨룸 속에 그 내공이 깊이를 더해가는 사회의 품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지금같이 말도 안 되는 집단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서글픈 일이 다시라곤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그렇지만 확실한’ 이 방법 이외의 다른 길은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