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어둠이 드리울 무렵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침이 밝아오자 이제 그만 하며 자리를 뜰 듯하더니, 아니 조금만 더 놀다 갈까 미련을 못 버리고, 하루 종일 오락가락 부슬부슬 어슬렁거린다. 한동안 따뜻하기 늦은 봄 같던 산골공기 차가운 얼음비에 바짝 움츠려든다. 덩치 큰 나무들 오랜 세월 터득한 지혜로 변덕 봄날은 믿을 수 없으니 조금만 더 참아보자 귀 막고 눈 감고 있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붉은 기운 노란 기운 한껏 뽐내던 꽃들도 갑자기 변해버린 세상모습에 놀라 얼어붙는다.
깊은 산속 시골마을 생활이 좋다함은, 날 궂으면 궂은 대로 또 화창하면 그런대로, 날씨와 자연이 어울리며 빚어내는 그림을, 살아 숨 쉬는 그 모습을, 그들과 한 몸 되어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요란하게 짖어 대는 세 뚝이가 이제 고요한 정적의 시간은 지나고 긴장과 시끄러움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린다. 비옷을 입은 한 무리가 산을 내려온다. 산이 좋아 물이 좋아, 날씨에 아랑곳 않고, 자연을 찾은 사람들이다. 어쩌다 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사나운 긴장감만 느끼게 되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마을 한 가운데 공터에 세워져 있던 버스에서 물건들이 내려온다. 정자 마루위로 흙발들이 어지럽게 올라가며 술판 노래판 준비가 이어진다.
도시사람들에게 있어서 산행이란 무엇인가. 직장과 일상의 답답함으로부터 해방되는 의식이요, 나도 해냈다는 성취감을 만끽하는 일종의 엑스터시 순간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그것은 자기들끼리의 인사 에티켓일 뿐이다. 산골마을 시골사람? 그들의 눈엔 존재가 아니오, 설령 존재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신들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요 인격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프로판가스통까지 올려놓고 본격적 요리를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화기는 삼가하시죠 신발은 벗고 올라가시죠 말하는 노인에게 훈계가 시작된다. 왜 시골인심이 이리 사나워졌냐고. 마을 발전을 위해선 외부인들에게 친절해야하는 것 아니겠냐고.
한 번 상상해 보라. 도심의 주택가 한 가운데 공원 정자에서 이와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어째서 도시 정자에서의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는데, 이곳 시골사람들이 아끼는 정자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는가. 왜 그곳에선 남이 시키지 않아도 주변을 깨끗이 하는데, 이곳 시골에선 마치 무슨 권리라도 되는 양 완전 쓰레기통으로 만들어 놓고 미안한 마음도 없이 그냥 떠나도 되는가.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고? 그렇다. 정말 그렇다. 등산객들이라고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고, 정말 일부 몰염치한 사람들이 가끔 벌이는 일인데, 그 '가끔'이 이곳 주민들의 입장에선 거의 '매일'이다.
산행 때 아꼈던 물건들도 이제 그 산을 벗어나 마을길에 들어서면서 필요 없게 되었음을 느끼게 되는지, 이곳저곳 보이지 않는 곳에 휙휙 던져버린다. 그 어느 누군가가 저 비탈길을 어렵게 내려가서 그것들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있지도 않다. 개가 짖는다고 돌멩이 던지고 몽둥이를 들이대기도 예사다. 항의가 오면 왜 기분 좋게 내려오는 나에게 재수 없게 짖어대느냐 오히려 당당하고, 짖지 않는 개를 키우라며 오히려 훈계조다. 일종의 센서요 살아있는 자동경보장치를 떼어내란 이야기다. 불쑥불쑥 들어와 화장실 찾고 동동주 찾는 사람들 마음은 시골사람들은 항상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기들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다.
이 천민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의 비애를 느낀다. 그들 눈에 비친 시골은 한심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러기에 대한민국 사람이 왜 대한민국에서 놀지 못하냐며 고성방가다. 농사나 짓고 감이나 따는 것으로 어떻게 살겠냐며 외지인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펜션을 짓고 음식점을 열라는 훈계는 역겨울 정도로 자주 듣는 단골메뉴다. 자기 동네 아파트 마당에서 멋대로 구는 사람을 말리다가, 오히려 ‘당신 그렇게 살아 어쩔 것이야’ 훈계 듣고, ‘좀 더 낫게 잘살 수 있는 궁리를 해봐야지’ 어깨 툭툭 치는 꼴 당한다면, 그 치욕적인 모욕을 며칠 만에 깨끗이 잊을 수 있을까.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대한민국을 양분하는 잣대다. 가진 1%가 나머지를 내려다보고, 부동산부자도 뭐나 되듯이 나머지 窮民을 우습게보고, 도시에 산다고 시골사람 우습게 보는 이런 모습 스위스나 노르웨이 프랑스 어느 나라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한 단계 더 나가 생각해보자. 일본 사람들이 한국은 자기들보다 가난한 곳이라고 여기 와서 우리를 한 단계 낮은 사람들로 깔보고, 항의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훈계하는 꼴을 당한다면, 그 사람들에겐 존경심과 수치심을 느끼며, 그냥 예예하며 물러서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아우르며 감싸며 존중하는 사회. 정녕 우리나라의 그런 모습은 꿈을 꿀 수도 없는 것일까?
'뚝틀이의 생각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안은 있는가. (0) | 2010.02.26 |
---|---|
음악회 티켓 (0) | 2010.02.25 |
바이올린 독주회에 다녀오다. (0) | 2010.02.24 |
개혁, 표심 (0) | 2010.02.24 |
입장 바꿔 생각하니 (0) | 2010.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