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는 '객관적 시각'으로 봐서 판단해야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객관성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
'제3자'의 시각? 그렇다면 누가 어떤 사람이 제3자인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 말이 좋아 그렇지, 어떤 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사안에 이해가 걸린 사람이다. 다시 말해, 그 사안에 대해 '덜 알고 있는 사람'이 제3자이고, 그 사람의 시각이 객관적 시각이라면, 이건 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그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은 거기에 이해관계가 걸려있지 않은' 그런 사람?
이런 어려움을 피하려면 그 제3자로 '보편타당한 상식'을 지닌 '제3자의 집단'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럴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상식' 또는 '사회적 통념' 또는 '당위성'.
하지만, 어떤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 사회적 통념을 적용시킬 수 없는 일, 바로 그런 일들에 대해서 이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 고민하기에 객관적 시각 운운하게 되는 것 아닌가. 철학적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결국, 사회적 통념이니 상식이니 하는 것은 '경험의 축적'이나 '선입견'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따라서 '객관적 시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 길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물며 당위성에 있어서야. 설령 객관적인 그 무엇이 있다하더라도(칸트의 경우에도 도덕성이나 미적 가치판단에대해서는 '언급'했지만, 그의 책에서 일반적 객관성이라는 관점에서의 논의는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이 내 판단 평가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
그렇다면 말이 모순적 느낌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주관적 객관성'은? 어떤 일에 대해 가장 고민을 많이하고 또 많이 생각한 '나 자신'이 바로 그런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또 무슨탐욕적 생각 또는 무슨 위선적인 자기합리화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는다면 '이해관계를 초월한' 판단 이 가능할 것이니 말이다.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을 자주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형태 이 방법이 과연 옳은 것인지, 혹 내 나름대로의 생각에 너무 몰입되어 객관적 시각을 잃은 것은 아닌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혹 자기최면을 걸어놓고 이것이 행복아닌가하며 나 자신에게 '행복감 강요라는 스트레스'를 주고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그런 생각에서.
동물이나 식물의 세계에서도 행복이란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까? 살아남는 것이 안도요 꽃을 피우는 것이 행복? 통념적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이해도 되지 않고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곳 그런 때 그런 환경에서 버티는 그들에 놀라며 마음을 가다듬게 될 때, 때로는 '모든 생각'이 깨끗이 지워지는 그런 느낌까지 받을 때, 사람의 '생각'이란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이켜보게 되곤 한다.
사회적 활동이나 인간관계에서는 객관성 운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이나 삶에 대해 객관적 운운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나. 삶은 그냥 삶이요, 행복은 그냥 행복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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