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더위는 아직 한여름 못지않지만 저녁 쌀쌀한 기운은 제법이다. 어제 달 사진 찍느라 너무 오래 밖에서 찬 공기에 시달렸는지 아직 몸살기가 남아있다. 이럴 때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게 된다.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다른 해와는 달리 금년엔 어렸을 적 생각이 더 자주 나곤 한다. 열등감. 나 자신을 특징짓는 단어였다. 일종의 원죄랄까 선천적 성격이라고 할까. 주변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을 계기가 없었던 어린 시절 그 환경, 누구를 탓할 수 없었던 나의 잘못된 판단 잘못된 선택, 이런 것들이 누적되며 내 자아를 옥죄었고 자책감만 쌓여갔었다. 그렇던 것이 완전히 바뀌던 날. 깊은 절망 그런 것 다 망각의 세계로 사라지며 내 삶이 완전히 바뀌던 날. 오늘따라 웬일인지 그날의 기억이 생생이 되살아난다. 사실, 그날 이전 며칠 동안은 참으로 서글펐다. 5개 대학 연합서클의 지도를 맡으셨던 교수님의 방문. 관광안내 쇼핑안내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이상한' 코멘트에 대한 '정확한' 통역을 강요하는 그분께 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젊은 혈기에 내 속생각을 밝히고 말았고, 결국 연구소 방문은 어색하게 대충 끝났고, 비행기 출발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모셔드렸고..... 집으로 향할 기분은 전혀 아니고, 잔디밭에 앉아 어둑어둑한 하늘만 올려다보다, 비통한 마음에, 도서관으로 향한다. 그 시간 갈 곳이라곤 거기밖에 없었다. 입구 가대에 놓인 책 하나 꺼내든다. 노란빛 겉장에 자잘한 제목들 깨알같이 새겨진 무슨 트랜잭션.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슬픈 마음 청년의 손에 들린 종이묶음일 뿐이다. 소파에 앉아 여기저기 그냥 넘겨보지만, 아직도 분이 사겨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란 나라, 내가 온 나라, 거기 교수란 사람이 그렇게도 품격에 대한 개념이 없단 말인가? 어떻게 그렇게도 생각 없이 자신과 자기나라의 자존심을 그렇게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그런 일이 아니었더라도, 내 삶이 정말 힘들 때였다. 3년 군대 공백 후 늦은 나이에,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학제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불확실한 장래 거기에 다시 끼어드는 온갖 회한 또 열등감에 더구나 전공에 대한 회의까지 겹쳐 심각한 방황을 겪고 있을 그런 때였으니. 책장을 넘긴다. 계속 넘긴다. 무슨 그래프도 나오고 무슨 단면도도 나온다. 도대체 이런 것이 내 인생과 무슨 상관있단 말인가. 참을 수 없는 분노 자신에 대한 분노가 다시 솟아오른다. 다시 꽂으러갈까 일어서려는데,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팍 들어온다. 장난스런 표현. 요약문을 읽어본다. 단어의 유희 같기도 하고, 무슨 외침 같기도 하고. 마치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자리에 다시 앉는다. 본문으로 들어간다. 도서관 닫을 시간이 되었다는 조용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릴 때까지 빠졌었다. 푹 빠졌었다. 어둑어둑 밤길을 밝혀주는 밝은 달. 그날도 오늘처럼 달이 밝았다. 내 심장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쿵쾅 쿵쾅. 세상에. 차원이 달랐다. 보통 사람들의, 나도 그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숨겨져 있는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보통사람들이라는 단어가 이 경우에 얼마나 어울릴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 내가 생각하던 보통사람들의 존경대상 그 차원의 사람들도 그 저자의 생각에는 다 세속적 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존재들일 뿐이고, 그 망각된 본질을 다시 근본적으로 하나하나 파고들어가는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탐구자. 실제 그 논문내용 그 접근방법부터가 달랐고 그의 시도야말로 정말 정신이 확 깨는 새로운 것이었다. 땅! 내 머리를 때리는 한 방!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세속적 관념의 틀에 갇혀있는 것 아닌가. 경쟁의 세계, 아무리 버둥거려봐야 도토리 키 재기 그 차원일 뿐인 세계 속에. 그 '논문 사건' 이후 내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그 후론 무엇을 읽을 때 무엇을 대할 때, 내 사고의 틀 속에서 경쟁이란 개념은 완전히 사라졌다. 본질, 근본, 그것만이 중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가치의 개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버렸고 절대가치 지향적 속성만 남게 되었다. 초조감이 사라져버리니, 새로운 시각 새로운 관점에서의 시도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다. 오늘 저 환한 달을 보며 그날 그 밤길에서의 심장고동을 다시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