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 로마에 대한 지식은 그저 여기저기 나오는 상식수준의 이야기 정도였다. '임페리움'을 읽어도 '비잔틴'을 읽어도 역시 코끼리 만지기. 테오드르 몸젠의 '로마사'를 다운받아 놓기는 했지만 그냥 계속 거북이걸음이고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야생화사냥철도 끝난 이제 태혜정광경성목 식으로 한 번 차근차근 로마시대를 훑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손에 잡은 책이 바로 이 ‘로마인 이야기’.
당연한 저자의 자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자기가 로마인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철저하게 로마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책이다. 로마의 역사는 ‘법’과 ‘길’을 바탕으로 하는 ‘시스템’, 책 읽는 내내 저자가 독자에게 주입시키는 주제다. 출발점으로부터 직접 민주주의였고 소수의 자의적 전횡을 막고 정당한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체계 즉 법을 그 근본으로 삼았다고. 이민족을 다루는데도 정복자와 지배자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정복된 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그들을 동화시키는 포용정책으로 대국을 이루었다고. 피정복 민족에게도 도움이 되는 인프라구조 마련에 국가의 역량을 쏟아 넣었고, 사회 상류층에는 노블리스오블리제가 당연이상의 것이었다고.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고 소설이라 말하는 저자의 상상력은 곳곳 전투 장면 묘사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마치 스포츠게임을 중계하듯 진용을 말하고 허점을 짚어나간다. 정복자와 지배자가 명확해지는 게르만족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공생하는 로마의 지배를 택할 것인가, 선택강요 장면의 카이사르는 현대사 정치인의 모습이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 절정’을 넘어서면서 나오는 황제들에 작가의 시각이 투영되기 시작한다.
모처럼 잡은 로마의 역사 이야기, 계속 읽고 싶은데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작가 아주머니 거의 병적이다. 한 번 한 이야기 하고 또 하고. 겨우 새로운 이야기로 넘어갔나 싶었는데 어느 사이에 전에 했던 이야기 녹음이 다시 흘러나온다. 초점이 흐려지는 정도가 아니라 짜증까지 날 정도다. 책을 덮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심해진다. 이럴 때 방법은 작가의 ‘견해’를 무시하고 ‘내 나름대로 줄거리’ 세워나가기.
역사책의 매력은 우리가 단편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작을 알고 있고 어떻게 끝나는지도 알고 있으니 그 중간과정 하나하나에 어떤 의미가 실려 있는지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의미'를 읽는 것, 이것이 바로 역사책 읽기의 요체다. 한 나라의 역사도 결국은 개인의 역사나 성장과정과 마찬가지, 아니 더 근본적으로 하나의 생명체에 적용되는 물리학의 법칙과 다를 바 없다. 엔트로피와 에너지, 이 관점에서 저자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나가며 읽어나간다.
어렸을 적 생명체는 에너지의 집합체다. 집중된 에너지로 떼어놓는 하나하나의 발걸음이 이루어내는 성취니 비록 적분치는 작지만 그 미분치는 괄목할만하다. 누구나 이상이 있고 어느 집단에게도 이념이 있다. 바라는 바 그곳을 향한 질서, 그 질서를 향한 걸음. 구성원의 마음은 한 곳으로 모여 있고 그들이 상대해야할 세계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이것이 로마 초기 역사다.
하지만, 성장이란 덩치가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또 이해관계가 겹치는 다른 존재와의 경계가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경계 저쪽 편의 다른 존재 역시 생명체. 여기에선 이해관계가 겹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로 인한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더구나 로마는 ‘정복 DNA’를 타고나지 않았던가. 한쪽 원래의 의도대로 세상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자연의 법칙.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늘어남에 따라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질서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필연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그 구성원의 마음 바탕에 자리한 철학. 아무리 심한 소용돌이 속이라도 지력이 유지되고 체력이 받쳐주는 한 그 진행방향이 어느 정도 살아있을 수 있지만, 이해에 걸려있는 것 가릴 것 많아 몸 사리게 되면 객관적 관찰력과 자제력은 기득권유지라는 본능적 속삭임에 가려지게 된다. 한니발 전쟁 후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시대만해도 아직 에너지가 응집되어있던 단계지만 그 후엔 그 동안 얻어 쌓아놓은 것이 너무 많아 흔들리는 단계로 들어선다.
개인에도 국가에도 성장과정에는 두 측면에서의 갈등이 따른다. 내면과 외양. 로마 내에서의 갈등이 내면적이라면 타민족과의 전쟁은 외양적인 것이다.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 절대적 옳음과 그름이 없듯이, 악명 높은 황제들의 광기도 일종의 성장통이다. 거기에 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은 어느 역사에고 반복되는 ‘자연의 법칙’이었고. ‘깡패’ 게르만족이 무서워 로마라는 ‘어깨’ 뒤에 갈리아가 숨었었지만, 팍스 로마나도 사실 잡초를 덮고 있는 ‘뚜껑’의 무게가 아직 효력을 발휘하는 시대에 불과했고, 5현재의 시대는 그 효력이 남아있던 마지막 시기였다.
작가는 말한다. 이민족에게 로마의 병사로 종사 후 제대하면 그때 가서야 로마시민권을 부여하던 그 ‘승급 사다리’를 철폐하고 모든 이에게 로마시민 자격을 허용한 조치, 문관과 무관의 엄격한 구별을 도입하여 원로원을 무력화시킨 조치, 이교도보다는 같은 이단을 더 증오하는 기독교의 속성, 이것들이 로마를 멸망으로 이끈 방아쇠들이었다고. 좋다. 인정한다. 따져보면 내적요인으로 그런 것을 들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로마의 관점에서 본 이야기다. 그렇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로마제국이 존속할 수 있었을까.
‘민족대이동’이라는 표현대신 ‘야만족의 침입’이라고 끝까지 고집하는 저자의 태도에 반감을 느낀다. 하나의 민족이 어느 시점에서는 다른 민족에 비해 열등할 수 있고, 야만적으로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 야만인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구조가 끝없이 계속될 수는 없는 법. 그 ‘상대적 야만도’가 줄어들었기에, 그 ‘야만인’을 누를 수 있는 힘이 부쳤기에, 로마가 그런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4인의 황제가 동시에 ‘적’을 막는 시스템을, 또 결국에는 동로마 서로마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었던가. 에너지와 엔트로피.
이렇게 생각해도 좋고 저렇게 생각해도 상관없다. 이번 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내 머릿속에 비어있던 중세이전의 ‘유럽역사’ 그 궁금증이 해소된 것 그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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