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의 생각세계

아부

뚝틀이 2011. 12. 18. 21:58

소설을 덮는다. ‘서커스’라는 이야기를. 아들을 잃고 난 후, 패스워드를 추측해내 파일 열고 그가 작업 중이던 원고를 보니, “옛날 옛적에 ‘장사꾼’이 있었는데, 우렁각시를 만났는데, 인간으로 변하는 우렁이 모습을 서커스에 구경시키며 끝없이 돈 쌓아갔고, 혼인은 예쁜 ‘딴 아가씨’와, 결국 그 우렁이는 계속 돈벌이에 시달리다 갇혀 죽게 되었고.....”라는 우화 극본. ‘대화의 단절’ 그것이 이 소설의 테마다. 돈밖에 모르던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심판? 비참히 살해되는 최후.

 

대화? 요즘 한창 유행하는 이런저런 콘서트 열풍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래 너는 불쌍한 존재야 난 이해하지 암 그렇고말고 그런 식으로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환심을 사기위한 목적만으로 진행된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다. 아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 소설에서처럼 초점이 아버지의 악에만 맞춰지고 아들의 반항이 그에 대한 당연한 반작용인 것처럼 묘사되면, 그것 역시 아부다. 자기들 논점을 정당화시키려 ‘한쪽 면 부각시키기’에 급급한 조중동의 견강부회 그 짓보다 나을 것 무에 있겠는가.

 

잘 나가는 사람들, 강남 부자들, 실리콘밸리 두뇌들, 그들조차 나름대로 무슨 핑계거리를 찾아가며 불만을 토로한다. '대화의 부재' 이외에도 불만과 부조리는 한이 없다. MIT 있을 때 그곳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완벽한 ‘단세포’적 사고방식이었다. ‘자기 앞길과 자기 앞가림’ 그 이외의 어떤 개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월가의 저 무리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의 미국 아이들이 내일 맞게 될 사회는? 결국 우리도 그런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삶이란 무엇인가. 마치 식물이 자기가 자라는 곳의 토양을 자기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옆 동네에선 무성하다고 옆 나무는 더 잘 산다고 부러워하며 한탄한다고, 그곳으로 ‘자동이동’되는 것 없듯이, 부모 잘못 만나고 사회 잘못 만났다고 내 자동적으로 선해지고 ‘문제’가 풀리는 것, 이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진리는 하나다. 생존경쟁과 자연도태 그것이 자연법칙이다. 냉혹함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세계의 아름다움 그 자체다.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하는 것 그것이 삶이다. 거기엔 ‘아부’가 설 자리 없고 ‘진실선언’ 그런 형식도 필요치 않다.  

 

그 증거를 관악산에서 보았다. 처음 그곳에 자리 잡았을 때 내 연구실 맞은편은 그냥 흉한 바위산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려 그곳을 떠날 때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바위들이 다 가려질 정도로 무성한 숲이었다. 바위에 숲? 그렇다. 황사에 실려 온 것이건 아니면 더 높은 곳에서 흘러내려 온 것이건 가리지 않고 뿌리가 자리 잡을 수 있을 만큼의 흙을 모아왔기에 ‘숲이란 것’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피와 땀’ 그 진리를 가린 채 어떻게 동정하고 이해하는지 귀 솔깃해지는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은, 그 아부는, ‘생각하는 식물’을 주저앉게 만드는 ‘죄악’일 뿐이다.

 

멘토? 좋다. ‘아부’를 하지 않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전체의 모양’과 ‘진실’이 무엇인지 들려준다면 그 호칭이야 어떻든 다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사회 이끌고 있는,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그 누구에게서도 ‘독일 국민에게 고함’ 피히테의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문학작품에서는 그런 관점을 요구할 수 없다고?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 글씨’, 진실과 고민을 호소하는 애절함, ‘읽는 이의 분노’를 각오하고 다수에 의해 ‘매장될’ 각오까지 하는 작가의 용기, 이 땅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자체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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