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다리로부터의 전화. "오늘 뭐 할 꺼유? 분홍장구채 생각 있우?" "세상에~. 그렇지 않아도 꼭 보고 싶었던 꽃인데." 래프팅에 사다리에 하도 험한 이야기만 들었던 꽃을 그냥 ‘편하게’ 볼 수 있다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긴급출동 아침 모드엔 이미 익숙해져 있다. ‘매뉴얼’에 따른 반사동작으로 속전속결. 그래도 혹 잊은 것 있나 다시 한 번 챙겨본다. 그렇지. 바위 틈 사이 녀석들 잡으려면 어쩌면 저 렌즈가 소용이 될지도. 여분의 카메라와 렌즈 또 삼각대와 비상간식. 안개가 너무 짙으니 운전 조심해 천천히 오라는 다리의 말이지만 여기 우리 쪽은 말 그대로 맑은 하늘. 하지만, 차에 올라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아래는 구름과 안개의 세상. 드물게 아름다운 모습, 가히 선경이라 할만하다. 차 세워놓고 한 장 찍어? 아서라 아서. 잠깐이 어디 잠깐에 머물던가.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뭐. 안개 덮인 속세로 내려와 터널과 다리를 지나 톨게이트를 통과하며 5분 후 도착을 통보한다. 차에 오르는 그의 말. "하루에 세 군데 도는 것은 무리겠죠?" 물론 세 군데 다 가고 싶다는 이야기다. "어려울 것 뭐있어요. 그냥 가면 되는 거죠." 결론을 그 스스로 내린다. 두 군데만 가기로. 어리연꽃과 분홍장구채. 사실 둘 다 내 그렇게 오래 전부터 꼭 보고 싶었던 꽃이다. 지난 번 갔다 시간이 너무 늦어 그냥 '지점 등록'만 해두었던 그곳을 다시 살려 내비아가씨의 안내를 받는다. 얼마 안 가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 안개는 맑은 날과 동의어라고 하지 않던가. 한 시간 반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는 사이 벌써 춘천. 답답한 시내를 통과하는 사이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하늘이 좀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어느 새 저쪽 먼 산엔 이미 비가 시작되는 것이 보인다. 이런 낭패. 이제 시간과의 경쟁이다. 제발 젖은 카메라 만져야하는 불행한 일은 없기를. 하지만 어쩌랴, 벌써 와이퍼가 창의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한다. 절 옆을 지나고 좁은 다리를 건너 연못 쪽으로 향한다. 장화에 우비에 물가로 내려서니 노랑어리연꽃들이 반긴다. 자연 상태에서의 이 꽃은 처음이다. 준비해온 삼각대에 망원렌즈 올려놓고 들여다보지만 전혀 선명한 상이 맺히지 않는다. 사실 이 500밀리로는 그동안 별 사진 새 사진만 시도해봤지 꽃을 들여다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 F 6.3 이 어두운 렌즈가 어울릴 리야 없지. 수동 초점으로도 몇 번 시도해보지만 전혀 가망이 없다. 빗줄기에 마음은 점점 더 급해진다. 이럴 땐 역으로 행동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이 중요. 이번에는 백마를 들고 논뚝외풀부터 시도한다. 이 꽃 역시 지난 번 전혀 건지지 못했던 것. 오늘이라고 다르랴, 초록색과 흰색, 잡기 힘든 조합, 역시 어렵다. 한심한 생각에, 저쪽 물가에 렌즈를 들이대고 있는 다리 쪽을 본다. 흰 어리연꽃, 아니 正名은 그냥 어리연꽃. 자그마한 이 꽃, 이게 사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아니던가. 다행히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곳에도 몇 개체가 있다. 어리연은 ‘깊은 곳’에만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조심조심 물가에 내려서서 렌즈를 들이댄다. 뽀송뽀송 마른 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빗방울에 다 뭉친 상태다. 비 맞은 뚝디 꼴, 아니면 비 맞은 박주가리라고나 할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내 이 귀한 꽃을 보게 되다니. 비는 본격적으로 쏟아진다. 그래도 거추장스러운 우비는 옆에 벗어놓고 미끌미끌한 돌 틈으로 편한 자세를 잡는다. 그냥 주저앉기. 초점을 맞추기, 이것도 사실 쉬운 운동은 아니다. 무거운 카메라 받쳐 들고 숨 고르기, 예전 사격 연습 때 열심히도 훈련 받았지만, 어려운 건 어려운 거다. 이젠 장화 속까지도 물이 꽉 찼고 온 몸에 젖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전화가 울린다. 응호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이 상황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에 또 땀에 시야가 뿌옇게 되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이제 그만. 위로 올라선다. 히야, 이건 또 뭐인고. 금년엔 그냥 놓치고 지나가는 줄 알았던 사마귀풀. 반갑다. 이건? 여뀌. 어제 청나래가 올렸던 흰꽃여뀌가 분명하다. 이 무슨 횡재인고. 들깨풀 쥐깨풀 자귀풀에 처음 보는 꽃들도 몇 눈에 띈다. 이름이야 나중 일이고 일단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는다. 이 빗속에 지금 뭐하는 짓이지? 그런 건 의미 없는 생각이다. 마음은 들뜨고 급하고, 이런 것을 다른 말로 기쁨과 흥분, 아니 엑스터시라고 하지 않던가. ‘제 정신’으로 돌아오니 꼴이 말이 아니다. 내동댕이쳐진 우비는 흙투성이가 되어있고, 또 무엇보다도 아까 그 젖은 곳에 한참 앉아있었던 터라 속옷까지 완전히 물수건 꼴이다. 후덜덜덜 떨며 차로 돌아와 완전히 새 세트로 갈아입는다. 그러고 보니 새 재킷도 하나 있다. 지난번에 사두었지만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저쪽 비닐하우스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다리도 어느새 그쪽에 어울려 있고. 이제 비는 억수같이 쏟아진다. 어디서 왔냐고. 자기들은 춘천에 사는 사진 동호회 소속이란다. 일기예보엔 오후에야 비 온다 해서 왔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빗속에서도 카메라 들이대는 우리를 보며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이제 결정할 때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다음 목적지로 향할지. 다리는 이런 비에 강행군은 무리라며 그냥 돌아가자 하지만, 썩 내키질 않는다. 여기까지 온 거리가 얼만데. 또 운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렇게 정리된다. 비가 그치는 행운을 점심 때문에 놓쳤다는 후회는 하지 않도록 점심은 생략하고 일단 목적지 근처까지 가기로. 무슨 자연학습 뭐 근처 어디라는데 내비게이션은 계속 모르겠단다. 다리의 머릿속에 입력된 지형 하나 믿고 그리로 향한다. 고속도로 휴게소. 그래도 뭐 간단히 먹는 게 낫지 않을까? 차 안에서 먹을 것 무엇인가 사는 것은? 패스, 패스, 결국 비상식량으로 갖고 다니던 크래커 하나씩 입에 물고 오물오물. 다행히 비는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이제는 행운을 빌 수밖에. 마주 오는 차가 있다면 비켜갈 곳도 없는 그런 좁은 길. 가고 또 가지만 무슨 간판도 눈에 띄지 않고, 내비게이션에도 하늘로 차가 가고 있는 그런 길만 계속되다, 드디어 안내받은 묘사에 부합하는 계곡이 나온다. 절벽 쪽을 더듬는 날카로운 눈빛. 있다, 있어. 바위 절벽 틈 사이로 몇 송이 보인다. 아니 눈에 확 들어온다. 갑자기 힘이 빠진다. 운전이 힘들었다. 차 세울 곳 찾고나 숨을 돌린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던가. 렌즈로 들여다보이는 꽃들이 너무 초라하다. 비에 젖은 꽃잎, 환상적 색감 그런 것은커녕 푹 젖어 축축 늘어져있는 그 모습들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쨍쨍 햇빛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으로 위안 삼고 눈에 보이는 모습보다 상상의 모습으로 담아본다. 빛 없는 곳에서의 사진 담기. 선명한 꽃술이라든가 날카로운 모서리 그런 것이 보이질 않으니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수동으로 해봐야 역시 마찬가지다. 할 수 없지 뭐. 그저 최선을 다해볼 수밖에. 갑자기 우르르 탁탁 소리, 후다닥 몸을 사린다. 다리가 올라서려던 곳 돌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조각 파편 구조인데 그 사이사이가 물까지 흠뻑 먹은 상태니. 잡히지 않는 떡이 더 맛있어 보이고, 저 위 다가갈 수 없는 곳 녀석들이 훨씬 더 예뻐 보인다. 급할 것 뭐있나, 이제 또 딴 곳으로 갈 것도 아닌데. 삼각대를 꺼내들고 다시 500밀리 렌즈를 대본다. 하지만 역시 아까처럼 상이 전혀 선명치 않다. 초점을 맞출 수가 없다. 색수차조차 보인다. 광각으로 바꿔본다. 역시 마찬가지. 돌 벽에 카메라를 착 붙여야하는데 그럴 곳이 없다. 마땅치 않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허기가 몰려온다. 어지럽다. 허탈하다. 잠깐 빛이 날 듯 하더니 다시 후두둑 후두둑. 이제 시간이 많이 늦었다. 어차피 더 이상 시도해볼 기운도 없다. 차 돌려 나오는 길, 그래도 마음은 상쾌하다. 사진 관점에서가 아니라 야생화관찰 관점에서 오늘 기대이상의 소득이다.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던 꽃들을 이렇게 여럿 만난 날이 얼마나 있었던가. 다리 역시 즐거워한다. 자기 사전 목록에 세 아이템 추가 되었다고. 나에겐? 이런 ‘대가’를 개인교사 모시듯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내리는 비가 시원하다. 시원하게 차도 닦이고, 시원하게 세상근심 잊혀져간다. 막국수 하나? 추운 날 고생했으니 차라리 밥이 낫지 않겠냐는 다리의 대답. 아무려면 어떠랴. 종업원 아가씨의 아버님 아버님 하는 소리가 오늘따라 귀에 거슬린다. 내 비록 강남 오빠 스타일은 아니지만, 또 나한테는 그렇다 쳐도, 다리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