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이주호의 ' 광해, 왕이 된 남자'

뚝틀이 2012. 11. 1. 22:07

소설을 읽기 전 중요한 것은 시대상황 파악.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 전후의 ‘국제정세’는 어땠을까. 그 동안 접했던 역사책, 소설, 사극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당시 흐름을 정리해본다. 우선 明나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재물에 눈이 먼 황제 萬曆帝 또 그 밑 신하들, 도탄 속 백성의 삶. 日本은? 100년 이상 계속되던 戰國時代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승자로 떠오른다. 그가 일으킨 전쟁이 바로 임진왜란(1592년부터 6년 반 동안). 임금 선조는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고 分朝란 이름아래 세자 광해에게 나라를 맡긴다. 明은 이 전쟁(중국에서는 萬曆朝鮮戰爭으로 표현) 후유증으로 국력이 급히 쇠퇴해지고, 이틈에 만주지방의 여진족(중국에서는 동쪽의 큰 활을 잘 다루는 미개인이라는 뜻으로 東夷族이라 부른다. 夷는 글자 大와 弓이 합쳐진 모양이다. 우리나라가 양궁을 잘하는 것도 어쩌면...)이 힘을 얻는다. 결국 後金을 선포한 누르하치가 明과의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광해군 재위 10년 때의 일이다. 明은 임진왜란 때의 은혜를 갚으라며 파병을 요구하고, 후금은 중립을 지키라 경고하지만, 광해군은 어느 편도 안 들고 중립을 지키려다 사대주의 신하들의 극력 반대에 부딪치고 결국 仁祖反正으로 쫓겨난다(1623년). 국호를 淸으로 바꾼 皇太極(발음, 황타이지)는 明편을 들었던 조선에게 君臣관계를 요구하며 ‘징벌’에 나선다(1636년 丙子胡亂).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던 인조는 그 추운 겨울 눈밭에서 세 번 엎드려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다.(상상이 가는가? 우리의 ‘임금’이....) 魏忠賢, 江山風雨情, 大淸風雲 등의 영화나 사극에서 보듯 明 역시 정신을 못 차리고 東廠(요샛말로 막강조직 정보부)중심 환관전횡시대를 거치다 황제 崇禎帝가 나무에 목매 자살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1644). (중국인들에게 淸은 사실 치욕의 역사다. 유구한 문화의 漢族이 오랑캐의 지배를 받다가 결국 일본에 꿇고 서구에 갈기갈기 찢기게 되었으니)

 

이런 내 ‘요란한 지식준비’는 보기 좋게 빗나간다. 제목에 ‘왕이 된 남자’ 이것이 핵심이었고 이것이 소설이었다. 그런 설정인지도 모르고 책을 손에 든 내가 서글퍼진다. 알량한 지식 몇 개로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재단하곤 하는 내 삶의 모습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이야기는 독살의 위험에 시달리며 움츠러드는 나약한 인간 임금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까맣게 변하는 은수저의 색깔, 분노에 치를 떠는 광해, 그럴수록 의연해야 된다 간하는 도승지 허균. 허균이 도승지였었나? 자료를 뒤져볼까 하다 그냥 계속 읽는다. 한 번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니 벗어날 수가 없다. 스토리 전개가 급박해서라기보다는 유연한 문체 그 매력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역사소설에 젖는 것 얼마만인가. 언급되는 도펠갱어의 필요성. 재주 있는 사람이라면 신분귀천 상관없이 집에 머물게 하는 허균. 그가 진짜 그랬나? 아니면, 춘추전국시대 맹상군의 삼천 명 식객 그런 설정으로 끌고 가려는 작가의 욕심인가. 검색엔진 들어가려다 역시 그냥 통과. 어쨌든 허균 식객을 통해 왕과 똑같이 생긴 만담꾼 하나를 찾아내는 행운을 얻고, 그 하선에 가짜 왕 노릇 교육을 시킨다. 말투, 걸음걸이, 신하에게 말하는 어법,... 역시 어디선가 읽고 봤던 그런 장면. 이번엔 실제 독살시도에 임금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비상사태가 발생하고 결국 하선은 낮에도 왕 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목숨을 건 허균과 내시의 임금 포장작업, 하지만 이 작업이 엉뚱하게 빗나가기 시작한다. 호기심 많은 만담꾼 하선에겐 모든 게 궁금하다. 대동법이 뭔지, 중전 그 아름다운 여인에 왜 웃음이 없는지. 백성이 굶어 죽든 말든 제 잇속 챙기기에 정신없는 사대부 그들의 착취, 무고한 사람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해버리는 당쟁, 거기에 명나라를 위해선 몇 만의 병사 목숨쯤 아무렇지도 않게 조정의 중신들. 싹트는 분노.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정치일 뿐이다.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허균에 맞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찾아가며 중신들 앞에서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하선. 아슬아슬한 이 만담꾼 하선의 곡예. 그래서 책 제목이 ‘왕이 된 남자’다. 사실 전체적 구성은 너무 단순하고 깊이가 없다. 일종의 코미디라고나 할까. 하지만 사대부 계급에 대항해 단호하게 대동법 시행을 명하고 힘없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백성의 목숨을 건지는 묘안을 생각해내고 억울하게 역모로 몰리는 충신을 구해내는 아슬아슬 곡예장면 거기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찡하게 하는 힘이 실려 있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당쟁을 일삼던 당시 중신들이나 여기저기 그룹 짓고 줄서서 악쓰는 오늘 이 나라의 정치인들이나, 자신들의 이익 지키기에 한 치의 양보 없이 똘똘 뭉치는 그때의 사대부들이나 오늘 여기의 기득권층이나 뭐 크게 다를 바 없다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상징적 질타는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될 법하다. 진정한 지도자는 누구 어떤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