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의 생각세계

‘내 죽음’이 ‘나’하고 무슨 상관인가.

뚝틀이 2012. 12. 21. 14:34

얼마 전 남들과의 만남에서 불쑥 튀어나왔던 말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죽음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남는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나 그것이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육체적 죽음이란 공포와 고통을 수반하는 본능적 거부감의 대상인지라 객관적 관찰이 힘드니 우선 정신적 죽음을 생각해본다.

마침, 이틀 전 대선이 끝났으니, 이 경우로 생각해보자. 한 사람은 승자고 한 사람은 패자.

선거 하루 전 표정과 오늘의 표정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명확하다. 살아남은 자, 살아남지 못한 자.

패자에게 남은 것이 무에 있겠나. 기껏해야.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느니, ‘사람들’과 ‘자신’ 사이 괴리가 너무 컸다느니 그런 푸념뿐.

다시 말해 출마 당시 원하던 것의 관점에서는 그는 죽은 자, 정신적으로 죽은 자다.

 

다음 기회니 뭐니 그런 이야기로 겉돌기 그런 생각은 없다. 생존경쟁의 장에 담겨있는 삶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시각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선거를 게임으로 바꿔본다. 경기장, 동그란 원, 그 안에서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육체와 두뇌의 능력은 요소일 뿐, 그 능력도 함께 고려하여 던지는 관중의 표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勝과 敗 갈리는 그런 게임.

 

사실 이 세상 살아나간다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최선을 다한 것과 그 일의 결과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

결정권은 오직 하나, 세상의 마음 즉 표를 쥔 관중의 마음 거기에 달린 게임.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관중마음이라는 실체를 알아볼 길 없다는 것. 불가사의 ‘일의 진행’ 이 현실에 놀라는 일 얼마나 많던가.

 

다시, 동그란 원에서의 게임으로 돌아온다.

동그라미에서의 이탈, 거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그 하나는 경쟁에서의 敗, 또 다른 하나는 그냥 스스로 물러서는 기권敗.

마지막 순간까지 버텨봄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 물러섬도 하나의 방법이다.

나의 힘 그 능력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관중이란 결정주체’가 존재하고 그 판단은 그의 몫임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는 자세.

어떻게 보면 용기이고, 객관적인 承服의 개념이다.

 

왜 하필이면 패자 입장에서의 생각이냐고?

승자도 마찬가지다. 동그라미 위에 더 이상 서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선 그 역시 언젠가는 패자가 된다.

지금 동그라미에서의 차이는 단 하나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의 차이, 즉 안타까움의 차이 그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설 속의 삶 그 세계를 보자.

물론 삶의 전체 궤도가 소설과 일치하는 실제의 경우란, 실화라면 모를까,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소설 전체가 아니라 그 중 몇 페이지만 잘라낸 부분을 생각한다면?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삶 무수히 많다.

 

이 몇 페이지가 바로 동그라미다. 삶의 세계란 이 순간 여기 내 눈앞에 나타난 동그라미뿐 아니라 다른 무수한 동그라미 모음이다.

삶은 그 무수한 기쁨안타까움의 모음이다.

정신적 죽음이란 그 마지막 동그라미에서의 아쉬움이고,

 

이제 원래의 출발점인 죽음으로 돌아온다.

동그라미 안에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기에 또는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물러나기 그것이 죽음이다.

‘그’ 직전 아니 ‘그’ 순간 내가 나 자신에게 느끼는 안타까움, 그 모습을 보는 다른 이가 느끼는 안타까움, 그것이 죽음이다.

이미 여러 차례 다가왔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동그라미, 마지막 동그라미에서의 안타까움, 그것이 죽음이다.

 

여러 형태의 죽음을 봐왔다. 예전에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생각했었다. 자연스런 죽음과 갑작스런 죽음, 그런 식으로.

그런데, 어떤 죽음에도 자연스런 죽음 그런 것은 볼 수 없었다. 好喪이라며 왁자지껄한 자리 영정사진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

판단은 ‘관중의 몫’이지 내 노력 내 의지의 산물이 아닌 그런 동그라미라는 것을 실감하는 자리 그것이 빈소였다.

 

이제 다시 원래 생각 ‘나의 죽음’으로 돌아온다.

‘나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나의 죽음이다. 아까 그 선거에서의, 아까 그 동그란 원으로부터의, 나의 이탈, 그것이 나의 죽음이다.

‘나의 죽음이 남들과 무슨 상관인가’ 하는 것은 동그라미로부터의 나의 이탈이 관중 아니 관중일부와 무슨 상관인가 하는 것이고.

 

상관이 있을까?

천만에. 동그란 원 안에는 계속 다른 사람들이 들어설 것이고, 관중 개개인의 느낌은 순간적 안타까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죽음와 무슨 상관인가’는?

나의 안타까움은 일시적 느낌일 뿐이다. 사라지는 순간 그 순간이 지나면 無의 세계다. 아무 것도 없다.

 

好喪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나’의 문제라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 그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진실.

그렇다면 그 ‘형태’에 내가 일으키는 ‘자그마한 원형무대의 자그마한 변형’ 그것은 나에게 허용된 마지막 선택의 자유 아닐까?

 

상관없다. 내 죽음은 남는 자들과 상관이 없다. 물론 사라진 다음의 나와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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