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떨어져있는 손주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지도 못했고,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에미 애비에게 송금해 ‘내 대신’ 선물을 사주게 하는 방식도 이젠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생각 또 생각하다가 정한 것이 동화책 들려주기.
내 간 다음에라도 긴 여운이 남아 있을 그런 이야기 들려주기.
고른 것은 바로 독일동화 ‘Max und Moritz,'
http://www.gutenberg.org/files/17161/17161-h/17161-h.htm
‘환상적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것이 아이들 ‘행복에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부모‘들은 펄쩍 뛸 이 이야기.
녹음해서 보내는 것은 비디오 시대에 어울리지 않고,
그렇다고 비디오는 배경음악과 화면 그런 것까지 신경써야하는데, 그건 내 능력 밖이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내 손으로 번역해주기.
생각은 간단했지만, 곧 벽에 부딪친다.
사실 이 Max und Moritz는 동화이기도 하지만, 문학작품이다.
멜로디는 없어도, 소리 내어 읽다보면, 리듬이 따라오고, 신명이 살아난다. 아름다운 음악처럼. 아니, 아름다운 음악이다.
그런데, 韻 맞추기, 이것이 이 ‘읽어주는’ 동화의 생명인데,
우리 애들은 독일어를 모르지 않나.
명사뿐이 아니라 동사의 어미변화까지 동원해가며 맞춘 이 韻律, 이것까지 번역으로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번역이라는 관점에서 또 하나의 문제.
음악성을 살리느라 운율을 ‘무리하게’ 집어넣다보니, ‘이야기 그 자체의 흐름을 방해’하는 리던던시도 많이 나온다.
이런 ‘리던던트 프레이즈’까지 꼼꼼하게 살릴 필요야 없지 않은가.
이제 아주 근본적 관점. 내 무슨 ‘문학’서적을 ‘공개시장’에 내놓으려 번역하는 게 아니지 않나.
아주, 간단히, 우리 손주들에게, 재미있게, ‘리듬’을 살려 들려주려는 것인데....
어쨌든, ‘정수’를 살리고, 또 읽는데도 리듬이 살아날 수 있는 분위기로, 번역은 마쳤고, 아이들에게 메일로 보냈다.
물론, 이 이야기를 그냥 우연히 적당히 그렇게 고른 것은 아니다.
나의 아이들 교육 원칙은 간단했다. 세상을 그대로 보여주기, 스스로 생각하기.
듣기 좋은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내 ‘생활철학’이고, 아이들에게도 ‘강요하지 않기’ 그것 또한 기본이고.
이제 Wlhelm Busch가 1865에 펴낸 이 ‘Max und Moritz, Eine Bubengeschichte in sieben Streichen’의 내용.
남을 골탕 먹이기,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하지만, 다른 한 편, 그 당하는 쪽은? 이것이 이 동화의 핵심이다.
재미있는 걸 어떡해, 또 하고, 또 하고. 이것이 현실 심리다. 그렇다면 천방지축에 대한 세상 쪽의 반격은? 이것이 이 동화의 결론이고.
첫 번째 못된 짓은 혼자 사는 아줌마가 키우는 닭잡기, ‘신나는’ 놀이다.
두 번째의 못된 짓은 그 아줌마가 눈물로 굽는 통닭을 훔쳐 먹기. 좀 지나치지만, 이렇게 계속하고 싶은 게 사람심리 아닌가.
하지만, 착한 ‘아줌마’ 쪽에서의 생각은 해봤는가? 소박한 아줌마의 소박한 꿈이 무너지는 그 ‘처절함’을?
동화는 동화다. 직설적 교훈의 냄새가 나는 즉시 아이들은 흥미를 잃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동화에서도 재미있는 매듭으로 끝낸다. 아줌마 집에서의 ‘코믹 신’으로.
세 번째 못된 짓은, 마을의 재단사 골탕 먹이기.
별명을 불러 화를 돋우고, 미리 파놓은 함정에서 일어나는 성과에 쾌재를 부르고...
하지만, 역시 끝 장면에선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네 번째는 ‘지혜’를 심어주고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마을 선생님 골탕 먹이기.
화약가루, 폭발, 화상, 이런 것까지 등장한다.
이제 누가 이 선생님 대신 ‘옳은 길’을 보여주고, 음악을 들려주지?
이야기의 분위기가 서서히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다섯 번째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집 일 도와주는 아저씨 골탕 먹이기.
이런 식이다. 피해자는 항상, 화목한 이웃, 필요한 이웃이라는 그림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런 ‘하모니’를 무너뜨려나가는 아 ‘악동’들.
이제 여기 끝부분엔 웃음 그런 것 없다. 단지 ‘안도의 느낌’ 그것뿐.
여섯 번째는 빵 굽는 마이스터. 부활절, 경건한 마음가짐, 그런 것 상관없이,
이번엔 악동들의 ‘욕심 채우기’ 그것이 주제. ‘이해관계의 충돌’ 거기에선 가해자에게도 고통이 따르는 법.
사실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사실, ‘엄청난 위기’였었다.
이번엔 당연히 깨달았어야 했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의 못된 짓.
생활전선, ‘먹을 것’을 갖고...
‘그로테스크’한 마지막 장면, 過猶不及, 事必歸正. 더 이상은......
self regulation이라는 세상진실을 보여주는 잔인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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