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작. http://www.tianyabook.com/luxun/lh/002.htm
중국 문학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통과하게 되는 魯迅(로신, 노신, lu쒼)의 작품, 그중에서도 ‘阿Q正傳’, ‘狂人日记’, 또 ‘孔乙己’.
독후감은 물론 철저하게 파헤친 분석도 흘러넘치는 이 작품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남긴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서너 번, 아니 그 이상 여러 번 읽었는데, 이번에도 또 그냥 지나가자니, 왠지 모르게 참 허전한 느낌이 들어, 몇 자 적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제 읽었던 니콜라이 고골의 같은 제목 ‘Записки сумасшедшего’과 비교해가며.
일단, 이 루쉰의 이 작품 내용부터.
주인공 ‘나’는 이름도 없다. 작가가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내’ 일기를 그저 이렇게 펴낸 것이다.
따라서 책 겉장에 있는 魯迅이 작가가 아니라 ‘내’가 작가다. ‘狂人日记’를 쓴 사람이니 내 이름을 狂人이라고나 할까?
今天晚上,很好的月光。我不见他,已是三十多年;今天见了,精神分外爽快。
才知道以前的三十多年,全是发昏;然而须十分小心。
不然,那赵家的狗,何以看我两眼呢? 我怕得有理。
오늘밤 달빛 참 밝기도하다. 내 달 보지 못한 지 이미 30여년, 오늘 밤에 보니 정신이 유별나게 상쾌하다.
지난 30여년 내내 아주 얼빠져 지낸 것 이제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그러기에 정신 더 바짝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그 赵씨집 개가 왜 두 눈 똑바로 뜨고 나를 보았겠는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도 일리 있지 않은가?
赵贵(조귀, 짜오꿰이)영감네 개들이 나를 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개들뿐이 아니다. 赵贵영감 이 사람, 아니 아까 모여서 수군대던 그 7,8명, 아니 길에서 만났던 그 사람들, 아니 거기다 또 아까 내가 소리쳐 쫓아버린 그 아이들, 이 사람들 모두 뭔가 꾸미고 있다. 난 그걸 느낀다.
이들이 도대체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나. 내 그들의 원한 살 일 그런 것 한 적이 없는데. 혹 내가 한 20년 전에 古久선생의 출납부를 밟아 그를 화나게 한 적이 있는데, 赵영감이 그 이야길 듣고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꼬드겨 날 미워하게 만든 것일까? 그럼 아이들은? 이 녀석들은 그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알았다. 부모들이 그렇게 가르친 것이다.
길에서 본 사람들, 전에도 본 사람들, 그 사람들 평소보다 어제 표정이 더 흉악했다. 더욱이 자기 아이를 때리며 물어뜯어도 시원치 않겠다며 我要咬你几口才出气 야단치다가 나를 쳐다보던 그 여자의 얼굴과 이빨! 그 모습을 보면 웃던 주위 사람들. 陈老五(진노오, 천lao우)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쳐다보던 집안사람들. 방에 들어오자마자 자물쇠를 치우던 나의 식구들.
전에 소작농들이 형에게 하던 이야기, 어떤 마을 악당이 죽자 사람들이 그의 간을 꺼내어 기름에 튀겨먹었다는 이야기. 내가 그 말에 끼어들었더니, 나를 차갑게 쳐다보던 그 소작인과 형. 이제 알겠다. 여기 식구들도 사람 먹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나도 먹어치우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아까 그 여자 나를 보며 ‘咬你几口’라 했던 것도 암호였을 것이다. 미리 짜놓은 암호. 형은?
我还记得大哥教我做论,
无论怎样好人,翻他几句,他便打上几个圈;
原谅坏人几句,他便说 “翻天妙手,与众不同”。
我那里猜得到他们的心思,究竟怎样;况且是要吃的时候。
난 아직도 형이 내게 论을 배워주던 때를 기억한다.
아무리 착한사람에게서라도, 뭔가 찾아 토를 달면, 형은 거기에 동그라미 몇 개 쳐주었고,
나쁜 사람을 용인하는 문구를 써넣으면 ‘기상천외’ 라든가 ‘독창적’ 이라 얘기해 주곤 하였다.
내 저놈들의 속생각을 짚어 끌어내볼 도리가 없는데, 하물며 잡아먹을 궁리를 하고 있는 때에야.
그냥 넘겨짚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연구하고 분석을 해봐야한다. 난 역사책들을 뒤져본다.
‘인의도덕’ 글자들이 삐뚤게 또 구부러져 있다. 어차피 잠들 수도 없어 한참을 더 보다 찾아냈다. 책 가득히 들어있는 두 글자 吃人!
歪歪斜斜的每叶上都写着“仁义道德”几个字。我横竖睡不着,仔细看了半夜,才从字缝里看出字来,满本都写着两个字是“吃人”!
내 갇힌 곳으로 들어오는 음식상에 놓인 생선 찜 하나, 이 녀석 눈 또 떡 벌린 입을 보니 사람을 먹고 싶어 하는 그런 모양. 젓가락을 대보아도 생선인지 사람인지. 결국은 다 토해버리고. 陈老五에게 밖에 좀 나가보겠다고 이야기해도 풀어주지 않고....
이어 의사를 데리고 오는 형. 하지만 난 안다. 이 사람 얼마나 망나니인지.
맥을 짚는다는 핑계로 내 살집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본다. 无非借了看脉这名目,揣一揣肥瘠.
한참을 꿈지럭거리더니 걱정할 것 없단다. 잘 쉬고 잘 먹으면 잘 될 거란다. 不要乱想. 静静的养几天,就好了.
살 좀 잘 오르게 해서 잡아먹겠다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조심스럽게 엄숙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난 참을 수 없어 한 바탕 크게 웃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我忍不住,便放声大笑起来, 十分快活.
내 용기와 배포에 눌리는 두 사람. 被我这勇气正气镇压住了.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 양반 형에게 하는 이야기,
빨리 잡아먹으라고. 赶紧吃罢.
고개를 끄덕이는 형. 아~ 형도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이구나.
그러면 나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의 동생이고. 내가 잡아먹힌다 하더라도 말이다. 식인종의 동생인 나!
설령 그 늙은이가 망나니가 아니라 진짜 의사라 해도 사람을 잡아먹는 의사다. 本草인가 하는 책에도 사람을 삶아 먹을 수 있다고 분명히 씌어 있지 않던가. 나의 형 역시. 내게 글을 가르칠 때, 분명 그는 ‘자식을 바꿔서 잡아먹는 일’은 있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예전엔 그저 흘려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저들은 죽은 고기만 먹는다. 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 조씨네 개가 짖기 시작한다.
하이에나, 죽은 고기만을 먹고, 늑대의 친척, 늑대는 개의 조상, 조씨네 개가 나를 노려보고...
딱한 것은 형. 한 패가 되어 날 잡아먹으려 하다니. 양심을 잃어서? 형부터 개심시켜야, 형을 찾아가, 문을 막고 서서,
“말하기가 참 쉽지 않는데.... 옛날에 원숭이가... 또 역사에.... 형이 날 잡아먹고 난 후 사람들은 또 나중에 형을.... ”
내가 막아서고 있는 문밖에는 조영감도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조영감의 개는 아예 안으로 들어오고.
처음에는 차갑게 웃음을 띠고 있던 형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더니 내가 본론으로 들어가자 버럭 화를 내며 밖의 사람들을 쫓는다.
“모두 나가요! 미치광이가 뭐 그리 재미있어요!”
“都出去!疯子有什么好看!”
이제 알겠다. 이들이 고쳐지기는커녕 얼마나 교묘한지를.
미치광이라는 핑계거리를 준비해놓은 것이다.
预备下一个疯子的名目罩上我.
이렇게 하면 나중에 후환이 없을뿐더러, 동정해 줄 사람도 없을 테니까. 이것이 바로 상투적인 수단!
난 소리를 질러댔다. 모두 마음을 고쳐먹으라고. 陈老五가 달려와 내 입을 막지만 난 계속 소리쳤다. 그러면 안 된다고.
나를 방에 집어넣더니, 이불로 씌운다. 이제 날 죽이려고? 난 있는 힘 다해 빠져나온다.
해를 볼 수 없다. 방문도 열 수 없다. 매일 두 끼 식사만 시간에 맞춰 들어올 뿐이었다. 나는 이제 내 누이동생이 죽은 것도 사실 형 때문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귀엽고 예쁘던 내 누이. 그때 어머니는 서럽게 우셨다. 울지 말라고 위로하던 형, 아마도 자기가 잡아먹은 것에 대한 가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도 그걸 알고 계셨을까? 어쩌면 알고 계셨을 수도. 그땐 내가 네댓 살 때였다. 형이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부모가 병이 들면 자신의 살을 한 조각 베어 푹 삶아 공양하는 것이 도리라고. 어머니도 거기에 대해 나쁘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조각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통째로 먹을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생각을 할 수가 없다. 4천 년 동안 때때로 사람을 잡아먹은 곳, 이곳에서 내 여기 섞여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 형이 집을 책임지자 누이가 죽었다. 형이 음식에 독을 섞어 우리들에게 먹이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이동생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 드디어 나의 차례가 …….
不能想了。四千年来时时吃人的地方,今天才明白,我也在其中混了多年;大哥正管着家务,妹子恰恰死了,他未必不和在饭菜里,暗暗给我们吃。我未必无意之中,不吃了我妹子的几片肉,现在也轮到我自己,……
아이들을 구해라.
救救孩子……
이미 몇 번 읽어, 그 내용을 알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중국 최초의 白話文 소설이라는 사명감에 작가가 그런 문체로 써서 그럴까. 마치 옆에 앉아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소곤소곤 작은 소리로 ‘들려주듯’ 그런 느낌이다.
도입부가 재미있다. 중국 전설에도 그런 것이 있는지는 몰라도 보름달이면 늑대가 울곤 한다는 서양 이야기가 떠오른다. ‘잡아먹음’을 연상시키는 늑대. 이 소설의 주제도 ‘잡아먹는’ 이야기 아닌가. 또 하나는, lunatic, 狂, 즉 ‘미치다’라는月光과 狂人의 연결. 이것이 작가의 암시인가?
여기 魯迅의 경우에도 또 고골의 경우에도 주인공은 자기가 미쳤다는 생각은 않는다. lu쒼 주인공의 경우엔 사람들이 함정을 파놓았다고 생각하고 고골 주인공의 경우에는 자기가 스페인의 전통 때문에 혹사당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주인공의 성격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저쪽의 경우는 허황된 몸부림 돈키호테 성격인 반면, 여기에서는 체제와 관습의 희생을 당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자기 보호를 위한 몸부림(생각부림, 그런 말도 있을까?)이다.
이러한 성격 차이로 ‘이야기 진행의 모양’도 달라진다. 저쪽에서는 ‘사건’이 계속 앞으로 진행되며 이야기꺼리가 제공되는 일종의 ‘소설’인 반면, 여기에서는 과거로 더 파고 들어가며 ‘분석’이 더해지는 그야말로 ‘일기’다. ‘재판정에서의 논고’를 준비하는 그런 작업이랄까.
고골의 ‘광인일기’와 비교해 여기에서 내 개인적으로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은 철저한 짜임새다. 위의 요약 초반에 푸른색으로 표시했듯이 등장인물들을 저인망 훑듯 용의선상에 올려놓는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나열이 아니라, 요약 그 다음 단에 초록색으로 표시했듯이 ‘논리적 연결고리’가 따른다. 이런 논리성은 뒤로 갈수록 더 구체화 된다. 어떤 ‘주장’에도 논거가 따른다. 여기서 말하는 ‘주장’이란 물론, 사람들이 자기를(물론 나중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 한다는 것이고, 그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논리적 심증’ 또는 ‘역사적 사실’로 뒷받침한다. 그냥 형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과거언행에서 무의식중에 표출된 사고방식, 또 누이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정황 묘사가 그렇고, 또 의서와 역사책에 나오는 과거의 ‘사례’ 또한 그렇고.
고골과 루쒼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그 분위기랄까 느낌이 주는 가장 큰 차이점은 ‘고발 내용’이다. 고골의 경우에는 귀족계급의 ‘허영과 사치’ 또 기득권의 나태로 인한 사회적 비효율의 고발이라는 ‘러시아 人民’의 ‘분노 자극’이 일정한 톤으로 계속되는 반면, 여기 이 루쒼의 경우엔 초기의 ‘狂人 개인’의 이야기라는 가벼움이 점차 ‘狂人이라 불리는 先覺者’의 ‘儒敎的 전통사상에 젖어있는 中國人民 전체’를 향한 외침으로 변해간다. "禮敎吃人! 救救孩子!" 저쪽에선 ‘읽는 동안’의 분노였다면, 이쪽에서는 ‘읽은 후’의 여운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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