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ise Rinser(1911-2002), Mitte des Lebens(1956)
이런 소설은 처음, 아니, 오랜만에, 아니, 처음 읽는다. 스토리가 없다. 아니, 있다. 아니, 없다.
소설 중에, 작가가, 아니, 작가의 동생이 소설을 써놓고, 스토리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작가에게, 작가의 동생의 입을 빌어 말한다.
자기는 스토리를 싫어한다고. 스토리를 원하는 독자라는 존재를 아주 싫어한다고. 스토리엔 ‘생각’을 담을 수가 없다고.
소설 속 話者 Margarete, 또 물론 그녀의 동생 Nina, 이 두 사람은 당연히 작가 Luise Rinser 자신이다.
하지만, 나라는 독자의 머릿속에 겹쳐지는 또 하나의 사람은 번역자 전혜린(1934-1965).
한때 누구에게나 필독도서였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쓴, 누구보다도 ‘죽음’을 살았던 여인.
Luise Riser의 이 책의 존재는 물론 전혜린의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그녀가 Carmina Burana를 작곡한 Carl Orff의 부인이라는 것이 더 흥미로운 사실이었고.
어쨌든 언젠가는 한 번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
번역, 이런 번역도 처음이다. 마치 자동번역기에서 튕겨져 나오는 듯, 생경하고 어색한 표현, 한참 생각해야 겨우 감이 잡히는 기계적인 문체.
(예를 들어, “나에게는 그런 측면을 보는 것이 적합하게 생각되었다.” 또는 “그 결단 속에는 위험스러운 종료의 폭력이 들어있었다.”)
번역자가 전혜린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 책을 잡았더라면, 전혜린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었더라면, 이 책 아마 일찍이 그냥 덮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읽는다. 읽어나간다. 이게 독일어로는 어떤 단어였을까, 여기는 원래 어떤 식의 표현이었을까를 머릿속에 그리며.
마치 무슨 법률조항을 읽듯이, 마치 무슨 심리학자의 어떤 난해한 논문을 읽듯이. 또, 지금 여기 이 부분을 옮길 때 번역자 얼마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을까 그런 생각도 해가면서.
Nina Buschmann이라는 여자가 있다. 못 생긴 여자, 절대로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는 여자. 아니,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사랑스러운 점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여자. 언니 말에 의하면 어렸을 적부터 그랬던 여자.
병원에 실려 온 여자. 언제 죽을지도 모를 그런 악화된 상태가 되어서야 찾아온 환자. 나 Dr. Stein은(이 책에는 ‘나’가 참 많이도 나온다. 話者Margarete가 이야기할 때도 ‘나’고, Nina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도 ‘나’고, 일기 또 편지에 쓰인 주어 역시 당연히 ‘나’고.) 열아홉 살 소녀, 나보다 스무 살이나 아래인 이 여자에게서, 내 인생 처음으로, ‘환자’가 아닌 ‘여인’을 느낀다.
거기에 또 한 사람, 話者, ‘나’는 동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 Nina가 어렸을 때도 같이 놀아준 기억이 없고, 또 동생이 아홉 살인가 그때 난 결혼으로 집을 떠났고, 그 후에도 무슨 대화도 연락도 없었다.
그런 동생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떠난다고, 떠나기 전에 한 번 만나자고. ‘무엇’인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 동생에게 간다. 그때 배달되어온 우편물. 한 꾸러미의 편지와 일기, ‘어느 남자’가 지난 동생을 생각하며 쓴 18년간의 기록. 이 기록물을 매개로 이어지는 며칠간의 동생과의 대화, 그것이 이 책이다. 시간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앞뒤 어지럽게 섞여가며 진행되는 ‘나’ 세 사람의 이야기.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시인의 詩처럼, 아니, 피어나는 장미꽃 한 송이에 카메라 들이대고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 모아 동영상으로 재생하듯, Dr. Stein 앞에서 ‘존재’가 피어난다. ‘아름다운 장미’라서가 아니다. 불쌍한 여자에 대한 연민이라서가 아니다. 병약하고, 가난에 찌들고, 고뇌에 찌들고, 고집에 찌들고.....
‘순간마다, 아니 순간에만, 성실한’ Nina. 어떠한 적응과 타협도 거부하는 그녀. 행복이란 단 몇 시간의 따사한 햇살일 뿐이라는 그녀. ‘의미 없게 진행되는’ 죽음보다는 ‘살아있음의 한 가운데에서 선택되는’ 아름다운 죽음을 원하는 그녀.
줄거리? 앞서 이야기했듯, 그런 것 없다. 불쑥불쑥 앞뒤가 뒤섞이며 튀어나오는 장면 장면을 추려서 다시 유추해가며 ‘그림’을 그려보는 것, 그건 독자의 몫이다.
16년 형을 선고받고 수용되었다, 나치의 패망으로 일 년 만에 풀려나는 Nina, 그래도 나치잔당을 먹여주고 치료해주는 그녀. 이건 삽화다.
뮌헨대학 학생이 된 Nina, 그 대학 교수로 부임한 Dr. Stein. 하지만, 아버지의 빚을 갚느라, 학업을 포기하게 되는 Nina, ‘만남의 꿈’은....
‘생계’와 ‘유산’ 약속에 친척의 시골마을 가게를 맡은 그녀를 찾아가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거절당하는 Stein, ‘만남의 시도’ 역시...
그녀의 시골생활 목적은 나치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안내였고, 그 역시 차량운반 역할로 그녀를 돕게 되는 Stein, ‘이용당하는 만남’
그 후 다시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만, 안락사라는 테마로 시작된 토론이, 선과 악, ‘사회’라는 개념으로 번져나가고, 이어 누가 ‘죽어 마땅한 사람’인지, ‘대다수’의 실체는 무엇인지, ‘국민 전체’를 위해 ‘아픈 사람’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인지, 결국은 ‘살인자’만 남는 것이 아닌지, 이런 불꽃 튀는 논쟁으로 ‘집단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위험을 무릅쓰기’를 마다 않다가, 결국 ‘의미 없는’ 학교를 그만 두고 일자리를 찾아나서는 그녀, ‘만남의 연결고리 파괴’
그녀를 향해, 나를 도대체 사랑하기는 하느냐고 묻는 나, 너는 단지 위험을 사랑한다고 단언하는 나, 그래요, 나는 ‘당신을 통해서 삶을’ 사랑하는 거예요. 대답하는 그녀. 떠나가라고 선언하는 나, 당신은 끔찍해요, 그래, 나도 삶이 끔찍해, 떠나는 그녀. “난 Nina를 영원히 잃었어, Ich habe Nina für immer verloren.” ‘만남의 종식’
이 하나하나가 다 삽화다. 이런 삽화들을 긁어 추려서 그릴 수 있는 그림, 그것이 ‘스토리’고.
이런 ‘기록’ 읽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동생, 언지가 읽다가 중요한 것 있으면 이야기해달라는 동생.
그때 또 전해지는 한 뭉텅이의 편지. 이번엔 Nina의 아이들로부터.
알렉산더와의 사이에서 얻은 열네 살 아들의 편지, 그리고 또 퍼시와의 사이에서 얻은 열세 살 딸의 편지.
(바로 이런 부분을 집어넣곤 하는 것, 그것이 작가 Luise Rinser가 과도한 페미니스트로 폄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도 아이가 있었으면, 말하는 나. 언니,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거야, 말하는 그녀. 그래도, 하며 말을 잇는 나,
언니 만약 언니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전쟁에서 전사했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없는 게 더 나은 거잖아. 대답하는 그녀.
이번엔 다른, 삽화가 들어있는 편지. 나 언니도 남편도 잘 알고 있는 그와 그의 ‘예쁜’ 부인, ‘행복한 부부’의 표상. 그 화가로부터.
그 삽화에 붙어있는 글, 너에 대한 생각 떠나질 않는다고. Nina의 코멘트, 매주 이렇게 보내온다고.
하긴, 그 부인도 남편을 속이고 있는지 누가 알랴.
그렇다면, 지금 잘츠부르크에 출장 중인 나의 남편은?
이어 남의 입을 빌어하는 작가의 말.
“生은 힘든 거야. 함정과 어둠에 가득 차있고,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모든 것이 거짓이야. 환상이야. 아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
동생이 떠난 후, 방에 혼자 남겨진 언니, 그가 읽는 동생의 다른 ‘순간’들.
‘순간적 열정’을 못 이기고 결혼한 후 닥쳐오는 환멸과 고통을 이기지 못해,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하는’ Nina,
‘Nina는 나에게 있어 生 그 자체의 상징’이라며, 마지막 순간에 달려와 구해주는 Stein.
그렇지만, Stein에 안기지 않는 Nina의 말.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고, 왜 나를 방해하느냐고.....
“누가 죽는 것을 막았다 해서 그게 곧 살린 것은 아니잖아.”
요양소로.
수용소로.
理性은 말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느낌’, 그 희망의 늪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환상에서 깨어나라는 친구의 충고,
“여자들은 언제나 우리를 실망시키지. 우리 남자들은 여자를 실망시키고. 참된 결혼이란 이 세상에 없다네. 다만 체념이 있을 뿐이지.”
“인간은 생의 의미를 물으면 결코 알지 못하게 되지요. 오히려 그것을 묻지 않는 사람만이 생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에요.”
‘늙은 베르테르의 슬픔’ 마지막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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