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식 책 요약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

뚝틀이 2015. 12. 27. 05:03

제2부

 

거울을 가진 아이 Das Kind mit dem Spiegel

   차투가 산에 돌아와 고독 속에서 지내기 몇 년 째, 외롭기는 하지만 지혜는 늘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꿈에 아이가 거울을 내미는데, 악마가 그 속에서 빙긋 웃으며 조롱하는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가, 적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제자들이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그 가르침 자체가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지혜를 나누어주려 다시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돌아가기로 합니다.

 

지복의 섬에서 Auf den glückseligen Inseln

   차투가 마치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떨어뜨리는 북풍처럼 제자들에게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자기의 가르침을 기독교식으로 변화시켜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창조’가 '완벽'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따라서 '신앙'이란 거기에 덧붙일 것이 없다는 믿음인데,

   반면, '창조하려는 의지'란 '자유'와 같은 것이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창의력을 말살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Von den Mitleidigen

   제자들이 자신들이 너무 교만에 빠진 것은 아닐까 고민하자, 차투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런 교만은 '아는 자'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적들이 너희들에게 자신을 너무 높이 생각한다고 비난해도,

      그래서 '옹졸하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악을 행하는 것'이 더 낫다.

      '아는 자'만이 위맨이 될 수 있는 법, 동정과 자비심은 그 누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데, 

       동정과 자비심의 상대는 자기 자신의 무력함이 노출되었다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그 분노가 쌓이며 곰팡이처럼 그의 내부를 갉아먹게 하기 때문이다.

       기쁨을 느끼는 것이 연민을 느끼는 것보다 낫다. 우리는 기쁨을 배우면서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성직자들에 대하여 Von den Priestern

   한 무리의 성직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차투가 말합니다.

      저들도 그 의도에 있어서는 나 차투처럼 고귀하고, 나 차투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나 차투처럼 더 높은 것을 지향한다.

      그런데, 저들을 잘못 인도하는 것은 구세주라는 개념이다.

      기독교는 무엇이든 회의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로 믿게 하고, 삶을 고통이라고 여기게 하고,

      사람들이 고통 받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그 속에서 신을 믿게하고, 신의 자비심의 도움으로 그 삶에서 도피하기를 원한다.

      삶의 불확실성, 삶의 고난, 그것을 믿는 저들은 삶을 포기한 시체와 같은 존재들이다.

 

덕에 대하여 Von den Tugendhaften

   차투의 제자들이 자신들이 덕을 쌓았으니 무슨 보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자, 차투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덕이라는 것에는 보상이 따르거나, 적어도 그 자체로 보상이라고들 하는데,

      이런 오해는 욕망을 추구하거나 악행을 저지르기에 너무 약함을 의미한다.

      덕이라는 것은 보상에 대한 희망이나 벌 받을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삶이 넘쳐서 진심에서 우러나와 하는 것일 뿐이다.

 

천민에 대하여 Vom Gesindel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 이들은 '천민'이다.

   천한 사람들은 손에 닿는 것마다 망쳐버린다. 이것은 역겨운 일.

   그런데, 사실, 이런 천민들의 존재가 위맨의 삶에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위에 올라섬으로써 순수성과 평화와 우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는 내 영혼이 이들 사이로 바람같이 불어가면서, 그들을 다 포용할 것이다.

   신에 매달리는 존재들, 또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 이것들은 없어져야 한다.

 

타란툴라에 대하여 Von den Taranteln

   민주주의, 평등,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타란툴라다. 이들은 비밀리에 복수의 독약을 퍼뜨리고 있다.

   모든 이가 평등할 수는 없는 일이고, 삶이라는 것은 갈등이요 자기 극복이다.

   위맨이란 존재는 바로 평등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저명한 현자들에 대하여 Von den berühmten Weisen

   진실과 대중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중에 영합하는 철학자와 그의 지혜는 사람들에 또 사람들의 미신에 봉사해야하는데, 이것은 명성과 영예를 얻기 위한 것일 뿐.

   그들은 보편화된 편견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켜야 하는데, 그것이 비록 대중과의 교감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고귀한 진실탐구를 포기한다면, 그런 추구는 진정한 철학가에게는 아무런 명성도 보답도 가져오지 않는다.

   이제 차투의 바람이 몰려오면 이들의 어리석음은 다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제까지는 설교요 연설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줄거리로 정리할 수밖에 없네요.

 

밤 노래 Das Nachtlied

   차투가 한탄합니다.

   나의 삶과 영혼은 지혜로 가득 찼는데,

   난 그 어떤 이도 어떤 것도 필요로 한 적이 없는데,

   그래도 내 이렇게 주기만 할 뿐 받지를 못하니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내 마음은 샘물과 같아, 내가 알게 된 것들을 나눠주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춤 노래 Das Tanzlied

   차투가 숲을 거닐다 샘으로 가는데, 거기에서 소녀들이 춤을 추고 있다, 차투를 보자 춤을 멈춥니다.

   그가, 자기 겉모습은 어둡고 무서워 보여도 속은 사랑과 가르침으로 가득하니, 멈추지 말고 계속 춤을 추라 합니다.

   그들이 춤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가 사랑과 삶의 지혜를 담은 노래를 불러줍니다.

   노래는 '삶'을 의인화擬人化한 내용입니다.

   비록 삶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삶 그 자체가 이해될 수 없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차투가 삶의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하자, '삶'이 답합니다. 지혜를 찾지만 않는다면 자기 깊이를 알 수 있다고요.

   그러자, 차투는 자신이 지혜와 삶에 사랑의 삼각관계에 놓여있는데 이 지혜와 삶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고 합니다.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삶'은 압니다. 차투가 지혜보다는 자기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하지만, 차투는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 지혜를 찬양하고,

   '삶'은 차투의 입에서 지혜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 단어를 삶으로 바꿉니다.

   언제나 바뀌고, 언제나 유혹하고, 언제나 사랑한다는 면에서는 둘이 서로 똑 같고.....

   이제 해가 지고, 자신의 지혜도 지고 있습니다.

   차투에게 자신이 여태까지 무엇을 찾았었나 하는 혼동이 와, 제자들에게 사과하려하는데,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저녁이 온 것이 미안해. 용서해줘."

 

만가輓歌 Das Grablied

   차투가 그의 어린 시절을, 그의 생각을, 그가 품었던 이상을 돌이켜봅니다.

   첫 번째 노래, 젊었을 때 품었던 그의 이상理想은 그를 떠나버렸습니다.

                      사실은 그 이상의 적들이 그것을 죽인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들은 이미 죽은 존재.

   두 번째 노래, 적에 대한 저주입니다.

                      자신의 영원과 위맨에 대한 비전을 죽인 그들.

                      자기가 믿었던 것들이, 그 생각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들에 대한 만가를 부르며,

                      희망을 다시 살리려, 춤추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노래, 적들이 자신의 이상을 죽였지만, 그는 절망 않고, 그 이상들을 다시 찾으려 합니다.

                      그가 없어지지 않고 묻히지도 않고 바위도 폭파시켜버릴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자기 안에 있음을 느낍니다.

                      바로 자기자신의 의지Wille. 그 의지로써 그 동안 잃었던 것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Macht을 다시 얻습니다.

 

자기 초극에 관하여 Von der Selbst-Überwindung

   차투가 이 세상에 있었던 '가장 현명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말로는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당신은 '진리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이 세상이 당신 앞에 무릎을 꿇게 하려고, 도덕이라는 것을 만들고 있어요.

      당신 생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해가면서, 당신 밑에 사람들에게 '진리'와 '도덕'을 만들어 보여주고 있어요.

   그는 그 시대 '도덕의 왕'이었는데, 차투는 그에게 대항하는 대신 그의 위대성과 그의 힘을 축하해줍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자신의 '논리'를 펼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복종’한다.

      자신에게 복종하지 못한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사실, 명령이라는 것은 복종보다 더 힘들고 위험하지만, 그것이 바로 기본적 의지이다.

      강한 자가 명령하면, 그 명령을 받는 자는 더 약한 자에게 명령하려 거기에 복종한다.

      그 결과로 사람들의 삶에서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특성이 생기게 된다.

      '진리'와 '도덕'과 '神'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다.

      결국 그들은 힘에의 의지 그 앞에 무너질 것이다.

 

고고한 사람들에 대하여 Von den Erhabenen

   차투가 '폭풍'과 '고요함'을 비유로 이야기합니다.

      진리를 찾는 경건하고 숭고한 사람들, 그들의 추구하는 자세 그 자체는 고귀한데,

      그들이 나처럼 평정이라는 것도 배우려면, 아름다움과 웃음 또 관대함과 친절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

      무엇에도 주눅이 들지 않는 근육의 강인함이 있어야하지만,

      또 그러면서도 그 근육의 긴장을 늦추기 위해서는 '힘의 행사'도 마다않을 수 있어야한다.

      가벼움과 친절도 소중히 여기는 강자, 그들만이 엄숙하고도 잔인할 수도 있기에,

      잔인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강자가 미덕을 갖추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 Vom Lande der Bildung

   현대인들은 과거로부터 배워, 마치 그 지식을 자기 것인 양 자랑하며,

   자신들이 회의할 수 있음에 또 미신으로부터 자유로움에 자부심을 갖는데,

   사실 이런 것은, 진정한 앎 그 자체도 없고 또 자신이 창조한 것이 하나도 없는 빈 상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백한 인식에 대하여 Von der unbefleckten Erkenntniss

   차투가 달을 비유로 철학과 과학을 비난합니다.

   명상하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고 느끼기만 함으로써

   그의 생각에서 자신을 일체 배제하고 철저한 객관성을 유지하겠다 그렇게 말하는데,

   그들은 달처럼 반사하기만을 원하지, 해처럼 비치기를 원치 않는 존재들로,

   이 세상에 자신들을 투입하기를 죄악시하고, 창조의 의지를 억누른다.

   그래서는 위맨이 될 수가 없다.

   해가 떠오르면 달이라는 것은 아무 힘도 없는 것,

   美라는 것은 의지와 창조의 욕구가 가장 강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학자들에 대하여 Von den Gelehrten

   차투가 비유를 들어 자기를 나타냅니다.

   자기가 나무 밑에서 잠들어 있는데, 양 한 마리가 와 자기 머리에 쓴 덩굴 화환을 씹더니, '학자가 아니네' 하고 떠났다고요.

   요즘 학자들은 창의적이지도 못하고, 속이 좁고, 맹목적으로 남을 따르면서, 여가활동 즐기듯 지식을 모으고 있는데,

   자기는 그런 학자에 속하지 않는 것이 자랑스럽다고요.

   자기는 복잡하게 접근 않고, 쓸데없는 생각이란 '독'에 물들지 않고, 아이들과 엉겅퀴와 양귀비에게는 의미 있는 학자라고 합니다.

   다른 이들은 잔잔한 잡음만 만들어내며 자기를 조용히 시키려고 하는데, 자기는 그렇게 조용히 될 사람이 아니랍니다.

 

시인들에 대하여 Von den Dichtern

   차투가 제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한 제자가 왜 전에 '시인들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말했는가 묻자,

   그는 시치미 떼고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하면서, 제자 자신의 생각을 이끌어냅니다.

      시인들은 창의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남들에게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더 깊게 보이려 든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낡은 선입견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너무 많이 속이는’ 존재들이다.

   차투가 시인들의 속성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신들을 창조하고, 천국과 땅 사이의 세계를 창조해, 사람들을 노예로 묶어놓는 경향이 있다.

      나는 위맨과 이제 앞으로 올 세계에 대한 시를 읊는다.

      나는 전에 있었던 어느 시인보다도 더 진정한 의미의 시인이다.

      시인 그리고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신과 세상을 설명해가며 거짓말을 했지만, 나는 위대한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대사건들에 대하여 Von grossen Ereignissen

   축복의 섬 근처에서 화산이 불을 뿜고 있는 섬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지옥의 입구라고 부릅니다.

   그곳에 닻을 내렸던 선원들이 공포에 떱니다.

   차투의 혼령이 "시간이 되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르짖으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요.

   이에 차투에 귀신이 들렸다는 소문이 퍼지고, 제자들이 차투를 걱정합니다.

   그 닷새 후, 차투가 나타나 말합니다.

       내가 불개Feuerhund 소문을 듣고,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으로부터 영양분을 얻는지 알아보러, 그곳을 다녀왔다.

       불개라는 것은 대지의 피부병을 의미하는데, 그 병의 하나가 인류이고, 그들이 일으키는 현상이 혁명인데,

       새로운 창조라는 구호에도 불구, 결국 이데올로기 싸움일 뿐이다.

       진정한 혁명은 위맨이 되는 것뿐이다.

 

예언자 Der Wahrsager

   차투가 꿈에서, 인류에게 큰 슬픔이 다가오고 있다는 어느 예언가의 탄식을 듣습니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모든 것이 똑같고, 모든 것이 ‘과거’ 그대로다."

          Alles ist leer, Alles ist gleich, Alles war!

   차투가 이 꿈을 이제 곧 몰려올 허무주의로 이해하며, 지쳐서 슬퍼합니다.

   차투가 제자들에게 다른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해석하라고 합니다.

       내가 관으로 가득 찬 어느 성에서 파수꾼을 하는데,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더니, 성문이 열리고, 관 뚜껑들이 열리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자 중 하나가 그 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차투가 그의 삶과 웃음으로 사람들을 이 우울하고 비어있는 삶에서 깨우는 뜻이라고요.

   차투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로하려 하는 말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가 이제 이 제자들을 떠나야할 때가 다가옴을 느낍니다.

 

구제에 대하여 Von der Erlösing

   차투가 어느 날 다리를 건너는데 한 무리 장애인들이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고쳐준 다음, 그때야 사람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것이라고요.

   하지만, 차투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기적을 행하면 명성이 높아질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사명을 수행하는 데는 방해가 될 것이라고요.

   그가 돌아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더냐. 시인? 진실한 사람? 해방자? 길들이는 사람?

   그의 사명은 오직 하나, 사람들에게 의지를 심어주는 것.

   그런 그에게 어쩔 수 없는 한계요인이 있는데, 바로 시간이라는 개념입니다.

   시간의 힘이란 거스를 수가 없는 것, 그가 역설적으로 제안합니다.

   과거 또한 우리의 의지가 그렇게 원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신중함에 대하여 Von der Menschen-Klugheit

   차투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중적 의지doppelte Wille를 이해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위맨 철학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려 취하는 일종의 방편이다.

      항상 속지 않으려 경계하느니,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차라리 속임을 당하고도 눈을 감아준다.

      헛된 자만심의 사람들을 그 스스로 만족하려는 태도를 재미있게 봐주며, 자신을 감춘다.

      사람들은 위대함을 보면 거기에 거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가장 고요한 시간 Die stillste Stunde

    차투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밤에 조용한 시간에 들었던 목소리에 대해 들려줍니다.

    자기에게 더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했다고요.

    이제 너무 약해지고 비효율적이 되었다고요.

    그의 인류에 대한 사랑이 위맨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요.

    차투가 자기가 너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가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떠나, 자기만의 고독 속으로 빠져듭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에 대해 들려주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가 한 밤중에 나와 혼자 조용히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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