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식 책 요약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뚝틀이 2015. 12. 28. 02:02

제3부

 

방랑자 Der Wanderer

   차투가 이제, 축복의 섬 반대편에 있는 항구로 넘어가려, 산에 오르려 합니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것입니다.

   마지막 여행을 앞두고 오르는 이 산, 그 앞에서 차투가 스스로를 반추합니다.

   어떤 여행에서도 그가 겪는 것은 자신이요 발견하는 것도 자기 자신.

   그가 궁극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 자신이 위맨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가 산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이제 가장 힘든 고통과 고뇌의 여행을 준비합니다.

   자신의 의지에 가장 큰 장애물은 인류에 대한 사랑입니다.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Vom Gesicht und Räthsel

   차투가, '멀리서 와서, 더 먼 곳으로 향하는' 배에 오릅니다.

   처음 이틀간, 그는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의 슬픔이 큽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든 '험한 여행'을 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어느 새 마음의 얼음이 녹아내립니다.

   그가 사자의 우화를 들려준 다음, 난장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난장이가 내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문에 표시 두 개가 있는데, 둘 다 영원으로 이끄는 문이라고 쓰여 있어, 내가 난장이에게 '시간의 수수께끼'를 던져보았다.

         “이 문을 누군가가 통과했었겠지? 어떤 일이 일어났었고, 그건 과거에도 이미 일어난 적이 있던 일이겠지?”

   바로 영원회귀 사상에 관한 것입니다.

   과거가 무한하다면, 바로 이 순간의 일도 과거 언젠가 일어났던 일이고,

   또 미래가 무한하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언제인가 또 일어날 것이다.

   용기는 모든 것을 극복하도록 해준다. 심각하게 보이는 것도 가볍게 생각하게 도와준다. 죽음까지도.

       “삶이란 무엇이지? 좋아 그럼! 이제 한 번 더!”

 

원치 않은 지복에 관하여 Von der Seligkeit wider Willen

   나흘 째 여행을 계속하는 차투, 그는 아직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그날 오후, 그가 갑자기, 자기 혼자 있음을 기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제자들을 위하는 길, 그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떠나야 합니다.

   마치 묘목 장에 있던 나무가 뿌리를 내릴 곳으로 다시 옮겨 심어져야하는 것처럼 말이죠.

   밤이 되자 그가 느낍니다. 이제까지 인류를 너무 사랑해 시간이 지체되었다고요.

   이제 훨씬 '더 위대한 그 무엇'인가를 위하여 자신을 다시 가다듬을 때입니다.

 

해뜨기 전 Vor Sonnen-Aufgang

   하늘이 침묵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한 차투, 이제 자기도 그 침묵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힘은, 그 하늘이 아름답고, 또 그 하늘이 모든 이성과 모든 목표 위에 있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우주는 어떤 이성이나 목표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다.

   차투가 학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들은 이 하늘에 구름 같은 존재들이라고요.

   그들은 진심으로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고요.

   차투가 이제 행복을 즐깁니다.

   그가 이 세상에 세례를 주려 합니다.

   이제 이 하늘처럼 여행에 나서려 합니다.

   외부의 어떤 이성이나 합리성에 지배를 받지도 않고, 자신보다 높은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끼지 않으려 합니다.

 

작게 만드는 덕에 대하여 Von der verkleinernden Tugend

   차투가 '사람'들에게 돌아와 보니, 그 동안 이들이 더 왜소해졌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행복과 덕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 가르침은 차투의 가르침에 또 위맨이 되려는 사람들에 방해가 되는 것들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덕을 혐오하는 차투를 증오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번영을 잃지 않으려, 차투의 자유를 시기합니다.

   그들은 그 만족에의 욕구에, 누구에게 해침을 당하지 않으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마주할 용기를 잃은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런 '비겁함'을 일컬어 '만족하고 감사하는 덕德'이라고 부르는데,

   차투는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지 못하는 이런 이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감람산에서 Auf dem Ölberge

   차투는 겨울을 또 이 겨울이 강요하는 어려움에 역설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겨울은 시끄러운 사람들을 조용하게 만듭니다. 안으로 잠겨드는 시간, 조용하게 되는 시간.

   차투가 시장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한없는 깊이와 행복을 보면 그에게 분노를 표하지만, 그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더 이상 시기하지 않습니다.

 

지나쳐감에 대하여 Vom Vorübergehen

   차투가 '큰 도시'의 입구에서, 자신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광대 같은 사람을 봅니다.

   차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흉내 낼 수 있는 이 사람이 그에게 충고합니다.

   이 성 안이 소인배들의 옹졸한 마음으로 가득하니, 들어서지 말라고요.

   차투가 이 ‘차투 원숭이’의 장광설을 막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가 틀렸다고요.

   이 광대는 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만,

   자기는 그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가능성을 알기에, 그렇게 되지 못하는 그들을 경멸한다고요.

   차투가 오히려 그 광대에게 성을 떠나라고 합니다. 증오한다면, 사랑할 수 없다면, 그냥 이곳을 지나치라고요.

 

배교자들에 대하여 Von den Abtrünnigen

   차투가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이, 다시 신에게 돌아간 것에 대해 실망합니다.

   그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자기의 '진정한 제자'를 구별합니다.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 말을 귀담아 듣기는 하지만, 어려움에 닥치면 외롭게 싸워나가기보다는 '아늑한' 신앙을 택해 다시 십자가 쪽으로 기어가는 사람들인데, 자기가 겪었던 난관을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은 제자라고 할 수 없다고요.

   그들은 차투의 가르침을 따르고 싶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 신이 있다는 희망을 유지하고 싶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고 싶어 합니다.

   차투가 고독 속에서 생각합니다.

   과거 그리스의 낡은 신들이 유일신에 의해 물러갔듯이, 이제 허무주의가 몰려오면서 이 유일신도 물러갈 것이다.

   낡은 덕과 가치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가 다시 모틀리 카우 도시를 떠나 산속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귀향 Die Heimkehr

   차투가 다시 산 속의 집으로 돌아와 고독 속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키우는 어머니가 된 느낌입니다.

   사람들이란 쉴 새 없이 ‘입’을 놀리지만, 사실은 ‘말’하는 것이 없는 이상한 존재다.

   철학자들은 말로서 '존재'를 설명하는데, 사실은 그들이 말로 '존재'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존재는 고독 속에서만 찾아지는 법.

   그들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다 경멸스러운 일일뿐이다.

 

세 가지 악에 대하여 Von den drei Bösen

   차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악을 칭송합니다.

   성, 지배욕支配慾, 자신에 대한 열정熱情.

   성이라는 것은 현재라는 순간을 확인하며 자손을 만드는 즐거움이요, 이것은 마치 위맨이 '삶'과 결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배욕은 모든 변화와 개선을 향한 원동력인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자신에 대한 열정, 이것이야말로 위맨이 되고자하는 추진력이다.

 

내리누르는 무게를 지닌 유령에 대하여 Vom Geist der Schwere

   전에 차투의 어깨 위에 앉았던 난장이와 같은 존재요 악마라면서, 이들이 사람을 묶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방해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전부터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육과 영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영은 고귀하고 육은 경멸해야할 것으로 여겨, 삶 그 자체를 아예 태어날 때부터 어깨를 짓누르는 짐으로 여겨,

      마치 항상 선을 추구해야 용서받을 수 있는 짐처럼 '무게를 지닌 유령'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이고 거짓이다.

      삶은 ‘짐’이란 ‘시험의 대상’이 아니다.

      살아가는 데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물어보라.

       "자, 이게 내가 사는 길이야. - 너희들의 길은 어디 있지?"

       "Das ist nun mein Weg, - wo ist der eure?"

     자신의 선과 악을 창조해내는 기쁨을 맛봐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부터 배워라.

 

낡은 지표들과 새로운 지표들에 관하여 Von alten und neuen Tafeln

(이제까지 차투가 가르쳤던 것을 회상하는, 30편의 시와 노래와 웅변입니다.)

   삶에 지치고 삶을 증오하는 자들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안다하고, 또, 선과 악의 기준이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세상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한다.

   어떤 시작이든 거기엔 이미 끝이 놓여있다.

         In jedem Anfang liegt schon das Ende.

   우주의 ‘상수’는 ‘변화’다.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삶의 역동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회복기의 환자에 대하여 Der Genesende

   차투가 자기 속에 심연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가 동굴 밖으로 뛰어나오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근처의 동물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가 구토증을 느끼며 의식을 잃자, 동물들이 그 옆에서 한 주일 동안 지키며 먹을 것을 가져옵니다.

   의식이 돌아와 회복기에 들어선 그가 말합니다.

      사람들이란 다른 이들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을 즐기는 존재다.

   동물들이 그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영원회귀 생각의 일부입니다.

   이건 그 동물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이제 차투가 '자연'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차투가 구토증을 느꼈던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것이 영원회귀라면, 그렇다면,

      평범하고 왜소한 사람들 그들을 위맨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바로 그 생각 때문.

 

커다란 동경에 대하여 Von der grossen Sehnsucht

   차투가 그의 (의인화된) 영혼에게 말을 겁니다.

   자기가 영혼을 살찌게 해준 모든 것을 들려주고, 영혼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누가 고마워해야지? 주는 나? 아니면 받는 나의 영혼?"

 

두 번째 춤 노래 Das andere Tanzlied

   차투가 (의인화된) ‘삶’과 맺어집니다.

   차투가 이 ‘삶’이란 여인과 춤을 추며 속삭입니다.

   시계가 열두시를 칠 때, 그 종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릅니다.

   땡~! 한 번, 이봐! 조심해! Oh Mensch! Gieb Acht!

   땡~! 두 번, 이 깊은 밤이 뭐라고 하지? Was spricht die tiefe Mitternacht?

   땡~! 세 번, 나 잤어, 잤다고. "Ich schlief, ich schlief -,"

   땡~! 네 번, 깊은 꿈에서 깨어났어. "Auf tiefen Traum bin ich erwacht:-"

   땡~! 다섯 번, 세상은 깊어. "Die Welt ist tief,"

   땡~! 여섯 번, 낮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어. "Und tiefer als der Tag gedacht."

   땡~! 일곱 번, 그 슬픔이 깊어. "Tief ist ihr Weh -,"

   땡~! 여덟 번, 기쁨, 마음의 슬픔보다 깊은 기쁨. "Lust - tiefer noch als Herzeleid:"

   땡~! 아홉 번, 슬픔이 말해, 가리고! "Weh spricht: Vergeh!"

   땡~! 열 번, 하지만 기쁨은 영원히 있기를 원해! "Doch alle Lust will Ewigkeit -,"

   땡~! 열한 번, 깊고 깊은 영원함을! "- will tiefe, tiefe Ewigkeit!"

   땡~! 열두 번!

 

일곱 개의 봉인(네, 아멘의 노래) Die sieben Siegel(das Ja- und Amen-Lied)

    (이 책의 66번째인 이 부분은 성경의 66번째인 요한계시록에 해당됩니다.

     단지 암울한 심판이 아닌, 차투와 ‘삶’의 결혼을 노래한다는 차이가 있죠.)

   이제 영원회귀를 받아들이는 후렴이 반복되며 노래가 계속됩니다.

      "오 영원이여, 난 너를 사랑해."

       Ich liebe dich, oh Ewigkeit!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