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합창 교향곡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관현악이 딴딴딴단 딴딴딴단 하고 슬그머니 물러나며 베이스가 묵직한 소리를 내는 그곳,
이곳에 '접근'할수록 심장이 쿵쿵대고 누군가가 내 귀를 잡아 세우는 느낌, 오싹하기까지 하다.
“O Freunde, nicht diese Töne! Sondern laß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오 친구들이여, 이제 이런 곡조는 그만! 우리 좀 더 아늑하고 기쁨에 찬 곡조를 노래하자꾸나.
이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합창단이 두 번 짧게 받고,
“Freude! Freude!”
기쁨! 기쁨!
이제 마음이 탁 풀린 듯, 베이스의 뚜벅뚜벅 걸음,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기쁨이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천국의 딸들이여......“
그러자 지휘자는 그 박자를 받아 흔들어대고, 관현악단이 춤추고, 합창단원들이 소리를 질러댄다.
비음악적 표현이라고? 그게 무슨 상관, 내겐 그 '무대'가 그렇게 느껴지는 것을.
이것을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 입힌 곡이라 생각하지 말고, 일종의 ‘연극무대’라 생각하면,
“오, 그런 곡조는 이제 그만!” 바로 이 부분,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베이스, 얼마나 답답했을까.
1악장부터 ‘계속 운을 떼는’ 관현악의 주제, 이것을 ‘번역’하자면 아마 ‘절망 속의 희망 탐색’ 그런 분위기일 텐데,
2악장에서도 3악장에서도 분위기가 바뀔듯하다가는 다시 또 그 ‘원래의 대사’로 돌아가 흥얼흥얼 반복되고....
베이스는 그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는 푸념에 ‘앞날을 보는 사람도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제 분위기가 바뀌는가보다 했는데, 어느새 다시 또 ‘이제 막다른 골목이네.’ 푸념이 반복되면,
베이스는 또 ‘이 세상에 도대체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이 있기나 하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을 꾹 닫고 참고 있었을 것이고.....
지금 내가 바로 그런 막다른 골목이요 앞날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있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O Freunde, nicht diese Töne !”
그 굵직한 나무람이 계속 내 귓전을 맴돈다.
‘푸념’이란 ‘희망’이 사라진 상태에서 나오는 ‘동물적 반응’이다.
그런데 그 ‘희망’이란 것이 무엇이지?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그림’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렇게’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지?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희망’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과연 있을 수는 있기나 한 것일까?
난 언제부턴가 ‘동물의 세계’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으면 ‘식물의 세계’에서 그 답을 구해보곤 한다.
식물에게도 ‘희망’이니 ‘절망’이니 하는 것이 있을까?
‘상황에 반응’하는 최선뿐, ‘설정해보는 상상’ 즉 ‘희망’은 없지 않을까?
‘희망’이란 것이 없는 세상 거기에는 상대적 개념 ‘절망’ 또한 존재하지 않을 테니,
앞날이 ‘보이니 안 보이니’ 하는 ‘동물적’ 푸념도 있을 수 없고,
막다른 골목이란 절망상황도 ‘보이지 않을’ 것 아닌가?
9번 교향곡 무대의 사람들, 아니 객석에 자리한 사람들, 그들에게 내 마음을 투영시켜본다.
이들 중 ‘절망’의 순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니 그런 ‘인간’이 있기는 있을까?
이제 나 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보이는 것’을 잊고, ‘보이지 않는 것’에까지 반응하지 않기다.
결국 삶의 아름다움이란 소멸에서 오는 것 아니던가? 식물의 세계가 내게 들려주는 것도 바로 그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