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게임. 분노가 치솟는다.
내 그렇게도 사랑하는 바둑, 그 예술도 컴퓨터의 농락 대상이 되었다는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체스가 딥블루에게 넘어갔듯 바둑 또한 같은 처지가 되는 것도 어차피 시간문제 아니었던가.
나의 분노는 한국기원 또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우리의 실상에 관한 것이다.
우선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대국 신청을 해왔을 때 한국기원의 반응이 나를 화나게 한다.
그들도 얼마 전 알파고가 바둑유럽챔피언을 이겼던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당연히 그 기보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세돌이 ‘한참 아래의 수준’인 그 상대가 도전해왔을 때 ‘이건 내 밥’ 하는 생각에 선뜻 응했을 것이고
한국기원에서도 우리의 ‘차원 높은’ 바둑수준을 확인시켜 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솔함은 ‘프로’들의 세계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절대로.
개인이든 법인이든 ‘프로’란 최대의 효과를 지향하는 존재들이다.
‘어린’ 이세돌 개인의 입장에서는 대국료나 우승 상금을 당연히 다 자기 차지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국기원이란 단체의 관계자에게 ‘본능적으로’ 먼저 떠오른 생각은 금전적인 것 이전에 한국바둑의 위상이어야 했다.
‘큰 틀’에서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 행사에 적어도 ‘바둑’이란 단어를 어느 곳엔가는 넣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행사의 명칭은 Google Deepmind Challenge Match.
매스컴 사진들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Baduk이란 글자는 없다. 어느 구석에도 없다.
겨우 하나, 한국바둑협회의 약자라고 추정되는 KBA. 하지만 그 무슨 소용인가.
사실 한국기원이 그동안 세상에 ‘바둑’이라는 단어를 알리기 위해 얼마나 애썼던가.
한때, 각국에 한국 바둑의 위용을 알리려, 일본 용어들을 대치하려, ‘영어 전도사’들까지 파견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유튜브에서 레드먼드 9단의 해설 중계, ‘조세끼’니 ‘아지’니 ‘모요’니 ‘코’니.... 보스턴 시절 그 분노가 다시 치솟아 오른다.)
알파고, α-碁. 바둑의 일본어인 囲碁의 碁go다. ‘고’의 알파로 군림하는 프로그램 그런 존재라는 자신감.
너무 국수적이고 속 좁은 생각이라고?
천만에. 이 행사는 Google의 또 DeepMind의 홍보용으로 기획된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인 한국은?
바로 이 흥행관점에서도 한국기원의 담당자는 신중했어야 했다. 정말로 한심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이란 이 행사의 상징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 역시 ‘본능적으로’ 간파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하게도 ‘승부’ 그것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깟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겠어?”
경마장에서도 우승 가능성이 없는 말에 돈을 걸며 그만큼 큰 리턴을 생각하듯,
“만에 하나 딥블루가 체스 챔피언을 이겼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생각을 했어야 했었다.
‘회사’와 흥정하며 계약서를 작성해야하는 교섭 상대라면 당연히 그 쪽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했다.
돌이켜 생각이지만 딥마인드라는 회사가 자신의 존재를 지금처럼 알리려면 얼마의 홍보비를 들여야 했을까.
하지만 내 분노는 이런 ‘한류 바둑’의 가능성 추구나, 홍보 효과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더한 것은 한국기원의 대응이 우리 일반적 사고방식의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구한말 쇄국정책이 치명적이었던 것은 외국의 실력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아예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 알량한 기보 몇 장 보고 상대를 평가, 이런 대사단이 일어날 가능성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런 건방지고 치기어린 사고방식은 경적필패의 속담에도 어긋나고 그 상징성은 매우 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번 게임이 중국 기사 커제와 이루어진 일이라고.
아니, 아예 구글이 알파 뭐라는 손자병법 프로그램으로 제갈공명 후계자에게 가상대결을 신청했다고,
"뭐? 서양 x이 손자병법 몇 개 배웠다고 감히 제갈공명의 후계에게 진법 도전을? 하하. 우리에게 용돈 진상하려고?"
그런데 마치 소설 Enders Game에 나오듯 게임인 줄 알았는데, 그 사이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라면?
실제로 그런 것과 같은 맥락의 사건들이 우리 주위에서 얼마나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내일 마지막 대국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인간’이 이기면 거기에 따른 해설이 수없이 나올 것이고, ‘기계’가 이겨도 역시....
정신 나간 사람들이 리턴매치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건 난센스, 이미 게임 오버다.
알파고의 실력이 일취월장한다는 사실이 이미 확인되었는데, 그 실력을 중간에 한 번 더 체크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에 하나 리턴매치가 있다면, 프로기사도 옆에 바둑판을 놓고 미리 놓아보고 두어야 한다. 그래야 공정한 게임이다.
그냥 머릿속으로 수를 읽는 것과 실제로 놓아보는 것, 프로의 능력은 거기에서 차이가 나는 것. 그건 큰 차이다.)
수업료 바쳐가며 유지하던 프로기사들과의 친분관계를 무슨 특권이나 되는 양 여겼던 날들이 생각난다.
이제 자기급수에 맞는 상대를 소프트웨어 회사들로부터 편하게 서비스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하지만 기계에게 배워야하는 게임이라면....
이제 다 무슨 소용. 딥블루 이후 체스가 그랬듯 이번 딥마인드 이후 바둑에 대한 인식은...
화나고, 짜증나고, 그렇지 않아도 라면봉지 쌓여가는 높이만큼이나 우울증이 증폭되는 날들만 계속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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