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ann Hesse (1877 – 1962), Siddhartha, 1922
이 소설은 부처님의 일대기가 아닙니다. 단지 주인공의 이름이 싯다르타Siddhartha일 뿐입니다.
고타마 붓다Gotama the Buddha께서 여덟 겹의 고행을 통해 열반Nirvana의 세계에 이르신 그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싯다르타Siddhartha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잘 생기고, 학식 있는 젊은이입니다.
사람들 모두 그도 아버지처럼 브라민Brahmin으로 성공할 것이라 기대하고,
그도 친구 고빈다Govinda와 함께 한가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행복과 평안을 가져온다는 가르침에 따라, 종교의식도 거행하곤 합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허전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속한 세계의 모든 지혜를 습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싯다르타는, 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과연 마음의 평화를 얻었는지, 내면에서도 행복한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자아를 향한 길, 아트만Atman에게로 나아가는 길, 애써 추구할 만한 보람 있는 어떤 다른 길은 없을까?
어쩌면 아버지도 단지 구도자이자 목말라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에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어느 날 사마나Samanas라고 불리는 한 무리의 금욕주의자들이 마을을 지납니다.
헐벗고 굶주린 그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육신이 갈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려는 이들. 싯다르타가 이제껏 배워온 것과는 다른 방법입니다.
그가 이들을 따라 순례에 나서려 하자, 아버지가 나서서 그를 만류하지만, 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역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던 고빈다도 친구 싯다르타를 따라나섭니다.
이미 브라민의 전통에 따라, 인내와 기강을 배운 적이 있는 싯다르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것만 남기는 사마나 식 생활에 어려움 없이 적응합니다.
일체의 자아를 극복하고, 물적 정신적 욕망과 충동을 떨쳐버리기.
한 마디로, 익숙해 있던 세속적인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죠.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궁극적인 것, 즉 존재 속 가장 내밀한 것, 그 위대한 비밀에 눈뜨게 되리라는 희망으로요.
싯다르타는 이제 예전의 그 소년이 아닙니다.
배고픔에 삐쩍 마르고 살갗은 검게 타고 거칠어졌습니다.
고빈다는 이제 도덕적으로 또 영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흡족해합니다.
하지만 싯다르타에게는 무엇인가 부족합니다. 영원한 해답이라는 것을, ‘자기부정’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사마나 무리의 연장자를 보더라도, 그가 진정한 영적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마나가 자신이 떠나온 브라민에 비해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때 싯다르타와 고빈다에게 진정한 깨달음, 즉 열반Nirvana에 이르신, 세존 고타마Gotama의 이름이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사마나 원로에게 가, 이제 떠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못마땅해 하지만, 싯다르타의 눈길이 그에게 닿자, 그는 마치 마법의 힘으로 마비당한 듯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를 찾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고타마와의 가르침에서 모순을 느낍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과, 육적인 것을 ‘극복하라’는 가르침 사이의 모순을.
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비밀,
즉 수많은 사람 중 혼자만이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생각에,
비록 고타마의 가르침이 위대하고 존경스럽기는 해도, 그 가르침을 통하여 해탈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싯다르타가 이번에는 그냥 남아있겠다는 친구 고빈다를 두고 혼자 길을 떠납니다.
숲길을 걷던 싯다르타에게 떠오르는 생각,
내가 원래 배우고자 했던 것은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 그런데 나는 이제까지 그 자아를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려 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모순이다.
내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인데,
그런데도 난 ‘나’를 두려워하며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지 않았는가?
이제 다시는 그 어떤 가르침도 받지 말아야지!
난 이제부터 나 자신한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싯다르타 나 자신의 비밀을 알아낼 것이다!
이제 싯다르타의 행적이 극적으로 변합니다.
명상을 멈추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던 것도 멈춥니다.
대신, 육적 쾌락과 물질적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구하기 시작합니다.
강을 만난 싯다르타가 배를 타고 건넙니다.
뱃사공 바주데바Vasudeva, 그는 단순생활에도 만족하며 삽니다.
그 강을 건넌 싯다르타가 도시로 들어가는데, 거기에서 아름다운 여인 카말라Kamala에 매료됩니다.
이 여인이야 말로 사랑에 대해 무엇인가를 배워줄 수 있는 존재 아닐까?
싯다르타가 그녀에게 다가가지만,
그녀는 재물을 모으는 능력을 보여주기 전에는 만나줄 마음이 없다며, 카마스와미Kamaswami란 상인을 추천합니다.
싯다르타는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습득하며, 카마스와미가 배워주는 기술을 곧 완벽하게 소화해냅니다.
옆에서 그를 도와주던 카말라는 그의 연인이 되고,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워줍니다.
시간이 지나며 싯다르타의 통찰력은 늘어만 가고,
이제 그는 물질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부유한 삶을 누립니다.
도박에, 술에, 춤에, 젖어듭니다. 돈을 잃던 벌던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단지 게임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카말라의 희귀한 새가 죽습니다.
새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가 느낍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일시적이다.”
그는 카마스와미에게도 카말라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그곳을 떠납니다.
방황하던 싯다르타가 도달한 곳은 어느 강가. 강물이 수천 개의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초록 눈, 하얀 눈, 수정 같이 투명한 눈, 푸른 하늘색 눈으로.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 사라지지만, 그래도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고 똑같지만, 매순간 새롭습니다!
싯다르타는 이제 더 사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강물에 몸을 던질까 생각하다, 강둑에서 잠이 들어버립니다.
잠든 그의 옆을 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 친구 고빈다입니다.
고타마에게서 수행을 계속한 그, 이제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부유한 사람이 되었음을 알아차립니다.
싯다르타는 자기는 이제 사마나도 부자도 아니라고 하지만, 고빈다는 ‘타락한’ 그에게 실망의 빛을 보이며 떠나버립니다.
싯다르타는 몇 해 전 자기를 건네주었던 뱃사공 바주데바를 다시 만납니다.
이 뱃사공에게서 싯다르타가 그렇게도 원했던 내면의 평화가 빛을 뿜는 듯합니다.
그 뱃사공이 들려주는 말, 자기는 오랜 세월 강을 들여다보며 마음의 평화를 배웠답니다.
싯다르타는 이 뱃사공 옆에서 일을 하며,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영적 깨달음을 얻기 시작합니다.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강가에 앉아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 강에서 옴Om 소리를 듣습니다.
어느 날 카말라가 그의 앞에 나타납니다.
고타마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에 아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하지만 그녀는 뱀에 물려, 싯다르타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둡니다.
죽기 전에 그녀가 들려주는 말, 저 아이가 당신 아들이에요.
싯다르타가 이제 이 낯선 아들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버릇없는 아들은 ‘뱃사공 아버지’가 싫습니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아들은 싯다르타의 마음을 계속 아프게 합니다.
점점 더 힘들어지는 부자의 관계를 보던 바주데바가 싯다르타에게,
아들을 다시 카말라와 살던 곳으로 데려다 주라고 합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어느 날 밤, 아들이 두 사람의 돈을 다 털어 훔쳐 도망갑니다.
싯다르타가 이 아들을 찾으러 나서지만, 카말라의 집 앞에서 발길을 돌립니다.
싯다르타를 다시 데리고 온 바주데바, 강물에 귀를 기울이고 고통을 달래라고 말해줍니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마주 앉아서 모든 것을 털어놓습니다.
오랜 세월, 그렇게 많은 대화를 하면서도 차마 털어놓지 못했던 모든 것을.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기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그 상처를 강물에 씻어 아물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란 것을.
바수데바가 이제 자기의 강에서의 삶은 끝났다며 숲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싯다르타는 혼자 남은 뱃사공입니다.
싯다르타가 강물을 들여다봅니다.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 다시 비가 되듯이, 삶의 모든 형태는 시작과 끝이 없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태어남과 죽음도 그 일체의 일부요, 기쁨과 슬픔, 산과 악, 이 모두가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일체의 소리,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세상을 이룹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합쳐져 사건의 강을 이루고 생명의 음악을 이룹니다.
모든 소리를 듣고, 그 전체이면서 하나인 소리에 귀 기울이면,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 옴Om이 됩니다.
싯다르타의 얼굴위에 깨달음이라는 즐거움의 꽃이 핍니다.
어느 날 고빈다가 강을 건너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하나 싯다르타는 그를 알아보고 말을 건넵니다.
“혹, 구도 그 자체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싯다르타를 알아본 고빈다가, 싯다르타가 예전의 싯다르타가 아님을 깨닫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는 찾아낼 수도, 체험할 수도, 지닐 수도,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지혜는 말하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싯다르타가 이렇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하지만,
고빈다는, 이제 자기가 너무 늙었다며, 깨달음에 도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며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 말을 들은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자기 이마에 입 맞추라고 합니다.
그 순간,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흐르는 강물에서 느꼈던 일체감의 힘과 이미지가 시간을 초월해 흐르는 것을 봅니다.
고빈다가 눈물을 흘리며 싯다르타에게 절을 올리는데, 싯다르타의 얼굴은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이제 두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구해 다녔던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뚝틀이 식 책 요약'의 목록을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뚝틀이식 책 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0) | 2018.06.06 |
---|---|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0) | 2018.06.06 |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0) | 2018.06.06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날’ (0) | 2018.06.06 |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0) | 2018.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