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의 생각세계

이공계 도전기 (서울대 전기공학부 글마당)

뚝틀이 2021. 12. 24. 01:31

2004. 1. 10. 13:48

이공계 기피현상이란 단어가 들먹여질 때마다 우리는 자존심이 상한다. 이 글마당에 이 문제를 들고 나오는 나를 곱지 않게 보는 눈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해는 마시길. 제목에서 보듯이 기피자가 아니라 도전자의 입장에서 우리의 앞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서이다.

빙빙 돌려 이야기 할 것 없다. 공과대학이 시들면, 제조업이 시들고, 제조업 없는 나라엔 서비스 산업이 설 자리도 없다. 이점엔 미국도 유럽도 다 마찬가지다. 산업이 다 시들시들해 없어진 후, 그 때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생각할 것도 없다. 멀리는 한국전쟁 때, 가까이는 외환위기 때를 돌아보고 거기에 악몽을 더하면 된다.  
혹시 우리는 이미 그길로 들어서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다. 지금은 단지 불경기일 뿐이다. 그것도 서민들만의 불경기이고, 가진 자들은 오히려 더 흥청망청인 ‘두 그룹’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과정에서의 첫 단계일 뿐이다. 경기가 풀려도 이 두 그룹 사이의 틈은 더욱 벌어지면서 호황속의 불경기는 계속될 것이다.

혹시 적성하나 믿고 이곳에 온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닐까? 이야기를 계속하기 전에 하나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엔지니어란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해 만들어내는 창작인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화가가 꿈인 사람에게 회계사를 권해보라. 그럴듯한 수입? 그런건 관심 밖이다.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그는 행복하고, 그런이들의 창작품으로 세상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우리의 앞날을 이야기하려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있다. 지금 보이는 우리 사회의 현 모습은 과거가 누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거의 제로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왔다. 제로 단계에서는 기반도 없었고 산업도 없었다. 가업이 없는 사람들은 실업자였고, 이런 사람 부지기수로 많았다. 보통의 부모들은 브레이크 전문가인 권력자나, 아픈 사람 고쳐주는 의사가 한없이 부러웠고,  자식들이 법대나 의대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좀 더 큰 것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시장’에 착안하게 되었고, 외국기술을 들여와 이 내수시장을 잡으려 권력과 결탁하게 된다. 사실 눈만 좀 멀리 뜨면 일본에 미국에 필요한 기술은 얼마든지 널려 있었고, 이 땅엔 일자리 구하는 사람들이 넘쳐흘렀으니, 먼저 손대는 사람이 임자였다. 이런 턴키 베이스의 외국기술을 들여오는 데는 권력자의 점지가 있어야 했고, 만든 제품이 팔리려면 정부가 수입규제로 시장에 울타리를 쳐줘야했다. 이런 식의 노동집약적 사업은 A가 하나 B가 하나 마찬가지였으니 기업의 흥망성쇠는 생사여탈권을 쥔 육사출신 권력자의 손에 달렸고, 이 육사클럽을 출입할 수 있는 핵심 멤버쉽을 따기 위한 고시열풍은 너무도 당연한 사회현상이었다. 기업이란 사람과 같아서 잘 나가다가도 때론 병도 얻고 탈도 나는 법.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계속 살아남느냐 여기서 끝이냐는 권력이라는 샛길을 통해 막힌 곳을 풀어야 하는 ‘해결사’의 ‘수완’에 달렸으니, ‘화려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원했던 전공은 법정계나 상경계였지 이공계는 아니었다. 적어도 정상적인 것에 가까운 사회였더라면 이렇게 까지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우리의 과거는 그렇지 못했다. 과학도 기술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능한 해결사였다. 엔지니어란 단지 물주가 어디서 구해온 기술을 소화해서 팔리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 누에고치일 뿐이었다. 실을 자아내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지 창작 따위는 사치일 뿐이었다. 그러기에 회사가 잘 굴러가도 그를 인정할 필요는 없었고, 이런 것들이 누적되어 오늘의 이공계 기피현상을 낳게 된 것이다.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풀어보자. 적어도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자본가-권력자-해결사의 합작품인 우리의 재벌 시스템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불합리한 또는 미비한 제도 하에서 마냥 늦어질 수밖에 없는 일들도 권력을 통한 샛길로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이는 오히려 후진성의 허점을 적은 비용으로 역할용 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이 우물안 게임으로 얻은 자신감에 취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얻어쓰고 덤벼들었다가 너무나도 처참하게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그로기 상태에 몰려 항복하면서 그동안 쌓아놓은 거의 모든 것을 외국자본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그리고 나서 이제 외자유치 만이 살길이니 어쩌니하는 헛소리들이다.
이 환란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을 때, 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을 예측하거나 경고한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있었던가? 부끄러운 우리의 브레인들이여! 그 당시 엔지니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자기의 기술은 없고 남의 것만 흉내 내어 지은 이 사상누각이 아주 작은 충격에도 힘없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아무리 애써 만들어도 돈만 생기면 외국제에만 손이 가는 국민의식 앞에서 살아남을 회사가 없다는 것을. 그러나 누에고치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도 없었고, 통역사도 없었다. 촛불도 꺼지기 전에 가장 밝다고 했던가? 오히려 그 당시가 ‘그들’의 전성기였다.
또 한번 물어보자. 그 암흑의 환란 속에서도 혹시 누군가가 삼성전자나 현대 자동차가 불사조같이 다시 살아나 세계를 누빌 것이라고 예측한 이는 있었던가? 더더욱 가엾은 우리의 브레인 들이여!
결국 우리의 그림은 이러하였다.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것은 누에를 빨아먹기만 하던 권력자와 재력가들이었고, 그 위기에서 다시 나라를 구해낸 것은 국회나 정부가 아니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회사의 엔지니어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반성하고 부끄러워 자숙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떳떳하게 후안무치의 추태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지 않는가.
불행하게도 지금 이공계 기피현상을 들먹이고,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사람들이다. 그들이 외치는 인재확보란 아직도 소모품의 확보를 의미하고, 그들이 외치는 기술개발은 단지 수단의 확보를 의미한다. 그들은 사고의 틀은 아직 초기 재벌중심 사회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들이 화려한 주체이고, 엔지니어는 객체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엔지니어가 주체인 사고방식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웅얼대는 20년 후의 한국모양에 의지해 우리의 앞날을 설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앞으로의 사회는 지금까지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해 나갈 것이고 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기술일진데 어찌 우리의 앞날을 우리가 만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삼성도 구멍가게가 커진 것이고, 현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출발할 땐 우리에게 기초과학도 생산기술도 없었기에 구멍가게였다. 그 때는 돈이 기술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글마당에도 들려보곤 하며 세상을 준비하는 우리 공학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은 그때의 한국이 아니다. 지금은 영어가 국제어라기보다는 엔지니어링이야말로 진정한 국제적 언어다. 엔지니어에게는 국경이라는 장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엔지니어야말로 진정한 국제인이다.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빌 게이츠가 가능하고. 스티브 잡스도 가능하다.
물론 이제는 선진국들이 그들의 기술을 가볍게 넘겨주지도 않는다. 한국이 가벼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벌써 몇차례의 뼈저린 부메랑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바뀌어 기술이 자본을 선택하는 시대로 변해있다. 우리는 취업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다. 그를 위해 나는 졸업생이아니라 엔지니어가 되어야한다.
물론 여유나 부릴 수있는 그런 한가한 환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지 ‘잠재적 경쟁국’ 정도로 여겨지던  중국과 인도가 ‘오늘의 경쟁력’이라는 거대한 존재로 떠올라 우리를 코너로 몰아내고 있다.  우리의 경쟁자는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저 중관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청화대학생이요, 방갈로르에서 밤새고 있는 IIT 출신이다. 우리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주인자리로 ‘내 몰린’ 오늘의 우리에겐 새로운 삶의 틀이 요구된다. 자신의 방법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자에겐 믿기 어려울 정도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그깟 한의사나 변호사의 알량한 수입과는 차원이 다른 존경받는 부가 기다리고 있다. 더더구나 쇠고랑 차기 십상인 그런 파워가 아닌 진정한 국제적 파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타성에 안주하는 자에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누에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출처 : 아이린님의 블로그 Sey's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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