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말 배울 때 읽은 소설 雪國이 처음이자 끝이었으니, 내 손에 일본책이 들렸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 그러나 거부감은 없었다. 1906-1955라는 그의 생존시대가 요즘 일본과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또 그가 바로 전후에 기존질서의 권위에 도전하며 자기 파멸적이고 충격적인 작품을 발표한 ‘무뢰파’의 대표작가라는 사실에서, 또 이 백치와 타락론이 바로 종전 다음해인 1946년 작품으로 인간본성 표출이라는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그랬다.
‘돌의 생각’은 자전적 소설이다. 전혀 인간적 존재로도 기억되지 않는 아버지와 증오대상 1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일종의 자기소개서 겸 내면성장보고서인데, 겉으로 보기엔 모범적인 사람들의 내면적 갈등과 선악의 개념을 무시한 자기묘사 특히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려 노력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계속되는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마력을 풍긴다.
‘백치’와 ‘어디로’를 읽는 내내 사람과 지명에서 일본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곤 할 뿐, 마치 이상이나 김동인의 작품을 읽는 듯 그런 착각에 빠졌었다. 그 당시 우리문학도 일본문화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지만 ‘벚나무 숲 속 만개한 꽃그늘 아래’는 달랐다. 뭔가 환상 속 괴기동화라고나 할까? 그 상징성을 알아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가가 이야기 끝부분에 고독과 슬픔이 그 상징임을 밝히는 부분에서도 그런 느낌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의 속도는 정신없이 빨랐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문장은 사정없이 사람을 빨아들였다.
이 책의 백미는 단연 ‘타락론’과 ‘속 타락론’이었다. 그 이름에 論을 걸었듯 여기에서는 작가가 소설형태를 버리고 직설적으로 웅변조로 외친다. 천황제는 실권자들의 편의상 만든 제도고 천황은 사실 그들의 로봇일 뿐이라고. 군부가 외치는 것 그것 역시 국민이 바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타락은 그들이 요구하는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진정한 타락을 통해서만 일본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시간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타임캡슐에 담겨있던 동영상을 꺼내본 느낌이었다. 브레히트와 보르하르트의 일본판을 만난 느낌이었다. 운명의 의미, 무력감과 허탈감, 삶의 진실, 인간관계의 실과 허, 이어지는 의문 또 의문.
'책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덕일의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0) | 2009.01.01 |
---|---|
신영복의 '강의, 나의 고전 독법' (0) | 2009.01.01 |
임희완의 '20세기의 역사철학자들' (0) | 2009.01.01 |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0) | 2009.01.01 |
최창호의 '20세기를 빛낸 심리학자' (0) | 2009.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