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켜놓고 듣다 가끔 드는 생각. 모차르트나 리스트 그 시대의 사람들 중 지금 이 음악을 이렇게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던 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나중 시대에 태어난다는 것 이보다 더한 특권이 있을까?
어디 꼭 시간적 격차뿐이랴.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그 대학의 학생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이 얼마나 특권에 해당하는가. 더구나 2500년 전 그 혼란의 시대에 선택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그 깊은 사상과 철학을 말이다.
이 강의록은 여타의 중국고전의 나열이나 내용소개의 책과는 그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저자가 강조하듯 이 책은 해설서가 아니라 古典讀法 즉 고전을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 또 그 사상을 강조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가며 ‘관계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옛것이라는 것이 과연 오늘날에 무슨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서문과 시 또 주역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본론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부분에서 논어 맹자 노자에 대해 비교적 자상하게 또 장자 묵자 순자에 대한 설명 그리고 한비자의 역할과 그를 보는 법에 대한 강의내용이 나오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제자백가 이후 불교의 전래가 중국사상체계에 비친 영향과 유교의 재정립에 대한 개괄적 풀이가 따른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매우 차분하게, 또 단어선택 하나하나에까지 온 정성을 들여 절제된 표현으로, 각 학파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애쓰고 있다. 또 각각의 사상을 독립적으로가 아니라, 상호연관(저자는 비교라는 표현을 매우 꺼린다. 비교라는 것은 그 성질상 비교대상이 되는 부분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원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방해가 된다는 그런 이유로)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도록, 흐름이라는 중심생각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아주 차분히 짚어나간다. 어떤 면에서는 저자의 깊은 인생철학과 사회관을 단지 그 중국고전이라는 줄거리에 따라 풀어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20년 넘게 철창 속에 갇혀있어야 했던 저자의 특수경험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중간 중간 고전의 몇 문장보다는 오히려 해설의 형태를 빌린 저자의 견해가 강렬한 빛을 발하곤 한다.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논리입니다.”(p.152)라든지, “정치는 근원적으로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p.172), 또는 “백성이 국가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참으로 두려워해야할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p.365)등이 그런 예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생각에 의해 바이어스된 부분이 없는 책이 어디 있던가. 오히려 그런 바이어스 때문에 인간적 체취가 느껴지고, 마치 지금 내가 아주 훌륭한 선생님을 개인교사로 모시고 성현의 가르침에 접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한 느낌에 빠졌었다. 책다운 책을 읽는 이 기쁨 참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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