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nst Gombrich의 세계사. 원제목이 ‘젊은 독자를 위한 짧은 세계사’인 이 책은 달랐다. 어렸을 적 세계사를 제대로 배워보지 못했다는 일종의 콤플렉스라 할까 그런 것에 시달리며, 이 책 저 책 손에 들어보곤 했지만 어쩐지 서양의 과거는 여전히 안개 속에서 움직이는 어지러운 그림자 같기만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한편의 풍경화가 산뜻한 색깔로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이 책이 다른 책과 다른 점은 전체의 흐름 설명에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이다.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거든’ 식의 일방적 던짐이 아니라, 그때 앞집과 뒷집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들이 무슨 이유로 어떤 일을 저지르고 겪고 했는지, 그래서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쳤는지 하는 이야기를 마치 심리학에 통달한 할아버지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자상하게 들려주는 듯 그런 분위기다. 군더더기는 과감히 자르고 필요하다면 사건과 상관없는 비유에도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할아버지? 이 책은 불과 스물다섯 살의 곰브리치가 6주라는 짧은 시간에 직장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르바이트 삼아 써 내려간 세계사 이야기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책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이다. 작곡이나 그림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문명과 문화의 복합적 흐름을 깊은 통찰력으로 이렇게 개성 있는 필치로 써내려간 그 작가이 방대한 세계사라는 책을 말이다. 하나의 설명이라면 그가 비엔나 대학에서 예술사에 대한 학위논문을 쓰면서 한 발 비껴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 이 책에 문화사적 색채를 강하게 집어넣은 요인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의 가능성을 그의 책을 다시 한 번 읽으며 생각하게 되었다. 독자에게 편안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그런 분위기가 좀 바뀌는 부분이 몇 번 나온다. 게르만족에 관한 이야기나 신성로마제국의 설명에서 그의 이야기가 너무 손이 안으로 굽는 듯해 약간 불편할 정도다. 왜일까. 그가 오스트리아라는 독일어권의 저자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약간 불편이 아니라 거의 아부에 가까울 정도의 표현들 때문이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 이 책이 쓰인 때가 1935년이라는 점. 또 그가 쓴 저서는 모두 영어인데 오직 이 책만 독일어로 썼다는 점. 이런 점들이 내 궁금증을 풀 어떤 단초를 제공하는 듯하다. 바로 그때가 전쟁배상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독일에 국수사회주의당 나치가 유대인을 표적으로 삼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하던 때가 아닌가. 검은 구름이 짙게 드리우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안전한 도피처 영국으로 떠나가기 전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젊은이로서 호소하고 싶었던 마음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미술의 역사와 미술심리사였다. 그의 호소에 귀 기울일 독자를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선 세계사라는 더 넓은 그릇이 필요했고, 그 딱딱한 그릇에 향기를 불어넣기 위해선 메마른 사건설명보다는 역사의 흐름이라는 이야기가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했을 터이고, 국수주의 분위기에 거슬리지 않게 게르만 족의 자부심을 한껏 부추기는 것이 필요했고, 이렇게 해서 이야기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역사란 그림을 바르게 이해시키며 다가오는 위험에서 자기민족을 보호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결과가 이 같은 명작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벌써 세번째 읽고 있는 그의 이야기에서 진정한 젊은 혼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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