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태어날 때부터 그 속 의자에 결박되어 벽만 보고 살아가는 인간들. 그들이 아는 세상이란 오직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이 벽면에 만드는 그림자.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비유하는 동굴인간이 이해하던 세계다. 이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면? 그 그림은 당연히 그림자그림이었으리라. 白과 黑이라는 色이 어울리는 그림. 시간이 지나서, 왜 그림을 그리는지 목적의식이 생기면서, 그 그림엔 線들이 자리했으리라. 사물의 모양과 위치를 더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白의 영역과 黑의 영역을 갈라놓는, 境界線. 이 線이야말로 그 현상계를 살던 인간들 최초의 발명이 아니었겠나.
어리석은 인간들아, 내 너희에게 진짜진실을 보여주마. 누군가 손을 내민다면 그는 죽음의 위험에 처할 것이라 플라톤은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진실을 왜곡’하려는 의도를 가진 그를 그 동굴인간들이 어찌 그냥 보고만 있었겠는가. 그래도 이들을 끌고 밖으로 나온다면, 그들 눈에 이 진짜진실 이데아계가 어떻게 비쳤을까. 아마도 앤디워홀의 느낌그림과 같은 충격이었으리라. 밝음과 어둠의 교차라는 對比가 만들어내는 그림.
사냥도 하고 보금자리도 만들며, 나무와 숲이 만들어주는 그늘을 찾으며, 그들은 차차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완전한 밝음도 어둠도 아닌, 밝음과 어둠이 한발씩 양보한, 아름다움이요 오묘함이라는 그늘의 위대함. 배타적 선명성을 자랑하는 밝음과 어둠 그 어느 쪽도 아닌 黑과 白이 어울리며 섞이는 곳, 동굴인간들은 그곳을 표현하려 灰色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인간최초의 보금자리는 黑도 白도 아닌 灰色의 領域 바로 그곳이었다.
생각하는 인간이 어찌 눈앞에 보이는 것만 그렸겠는가.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 같은 강렬한 느낌도 무늬란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이 무늬로 나타낸 그림이야기와 그림역사가 퍼지고 전해지면서 공감과 이해의 세계를 열게 되었다. 회색의 짙음과 옅음이 느낌의 강약을 표시하듯이, 사람들은 이 무늬란 글자로 자연과 이웃과의 만남 또 생각과 느낌의 아름다운 교차를 그려나갔다. 문자, 이것이야말로 인류최초의 위대한 발명품이 아니겠는가.
문화와 문명은 관념과 사상이라는 집단유희와 그 궤를 같이한다. 그림과 글자가 지식의 도구로 쓰이면서, 사람들은 앎과 모름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있음과 없음을 구별하게 되었고, 이해득실이라는 계산을 토대로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게 되었고, 결국 우리 편과 저쪽 편을 가르게 되었다. 이웃과 자연이 생활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회색의 아름다움도 사라져가게 된 것이다. 흰 종이의 극히 일부분만이 글자로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검은 글자에만 빠져 들어가게 되면서, 새로운 경계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正과 反이 물고 물리면서, 흑과 백의 合이라는 회색이 생겨난다. 헤겔 이전의 동굴인간들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이 合이 다시 正이라는 白의 행세를 하게 되면, 그에 대항하는 黑이 나오고 이 正과 反은 다시 合이란 회색이 된다. 이것이 문명이고 이것이 역사다. 꼭 포성이 들리고 자욱한 연기가 나야 전쟁인 것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바로 치열한 이해관계속의 전쟁에 다름 아니다. 이 삶이란 전쟁에서 이해를 같이하는 우리는 白이고 저쪽은 黑이다.
그런데 白에게 있어서 그 黑보다 더 가증스러운 존재는 저 회색이다. 우리 편이 되기를 거부하는 灰色分子, 저쪽 편과 다를 것 무에 있겠는가. 조급한 마음으로 흑백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회색의 의미는 그렇게 변했다. 결국은 백과 흑이 만나 회색을 이룸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 회색이 正의 편도 反의 편도 아닌 공동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다. 양심을 따르려 오른 길을 따르려 집단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선구적 소수는 이런 서러움이요 억울함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에 살고 있나요? 회색이 사라지며 겹침과 만남의 공간이 사라진 우리사회에서 콧대를 높이 세운 사람들이 조롱하듯 묻는 말이다. 오늘의 우리사회, 여기에선 0과 1의 만남이 없으니 마음과 마음이 오가며 만들어지는 회색이 설 자리가 없다. 옳음이냐 그름이냐, 흑인가 백인가, 간단명료한 구분만 존재할 뿐, 깊이 있는 대화라는 사치는 설 자리조차 없는 것이 우리사회다. 오직 0과 1이란 두 가지 값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 흑백 세상엔 삼각형의 균형도 없고 오각형의 안정도 있을 수 없다. 깃발이 펄럭이는 양쪽 끝의 이해가 날카롭게 부딪치는 파열음만 난무한다.
회색이 그립다. 회색이 번져있는 아날로그의 세계가 그립다. 맺고 끊음이 없고, 나의 생각이 상대의 생각과 자연스레 겹치는 그런 세계가 그립다. 상대의 생각이 옳아서가 아니라 틀리지 않기에 끄떡이게 되는 대화의 색깔은 회색일 수밖에 없다. 회색의 세계 한 가운데, 만남의 광장이 세워질 수 있는 곳은 거기뿐이다.
그 광장 한가운데 기둥에 박힌 글: "주장하는 만큼 잃을 것이요, 숙이는 만큼 얻을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