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사랑해~? 응! 얼마크~ㅁ? 하늘만큼 땅만큼! 이런 문답은 사실 배워서가 아니다. 실제로 그만큼 사랑한다. 그건 진심이다. 젊은 연인 사이에선 어떨까. 나 사랑해? 그래. 얼마큼? 헑. 사실 어쩌면 지금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엄마보다 훨씬 더 좋아하면서도 하늘보다 땅보다 더 그 말이 쉬 안 나온다면 그건 왜일까. 아이와 어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어서일까. ‘참 잘했어요.’ 도장이 점수와 등급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두뇌구조 생각구조가 바뀌어서라고? 정말?
내가 책을 읽은 후에도 알라딘에 독후감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평점 별표 채우기 그것이 싫어서이다. 수우미양가 다섯 등급이 아니라 ABC 세 등급이라면? 그래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A-도 B+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사실 말이지 A-와 B+는 하늘 땅 차이요 ‘미’가 중간일 것 같아도 실제 느낌은 맨 밑바닥 아닌가. 연인 사이에 내 널 Ao만큼 사랑해 했다간 그것으로 끝이고, A+란 대답에도 나 말고 A+가 또 몇 명인데 라는 질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사춘기가 되었다고, 나 엄마 A-만큼 사랑해 했다간 그 엄마 돌아서서 눈물짓는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물음에는? 너 지금 행복해? 물음에 선뜻 “그래, 하늘만큼 땅만큼”이라 답할 수 있는 사람 아니 그런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그런 답이 나오는 순간, “A+말이지?”하고 다시 고쳐 묻는다면?
딱지치기 그 시절. 그렇게 많이 땄다 좋아하다가도, 다른 애 더 불룩한 주머니가 느껴지는 그 ‘상대평가’의 순간에만 맥이 빠지는 게 아니었다. 그 ‘많아’ 보이던 쇠구슬이 100개도 아닌 92개‘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날 때 그땐 더했다. 다음 날 120개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200개가 되려면 아직 80개를 더 따와야 한다. 절대평가 역시 본질적으로 ‘기대치’에 대한 상대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8점 모자라던 92점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120처럼 느껴졌다가도 곧 이어 다시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무빙 타깃 그 본질적 성격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게 “엄마 더 사랑해 아빠 더 사랑해”에 대답하기다. 여기엔 상대평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무서운 진실은 그 순간 부모가 비교와 평가의 대상 그런 존재로 굴러떨어진다는 비극이다. 자기 자신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상대평가 절대평가 그 어느 쪽도 마찬가지다. 아 참 잘 읽었다 하고 책을 덮다가도 별 몇 개 줄까 생각하는 순간 그 흡족감은 急轉直下고, 하늘이라도 날아갈 듯 좋아하다가도 이게 도대체 기대치의 몇 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인지 또는 과거 그때 비해서 이번에는 하며 따져보는 아니 따져보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big bang 버금가던 喜悅은 big crunch 무색하게 사라지게 마련이다. 내 지금 하는 일, 나의 그 사람, 내 있는 곳, 내 가진 것, 나의 지금 그냥 모두 그저 하늘만큼 땅만큼, 그 생각수준 그것이 정답이다. 모든 것의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