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의 생각세계

자동차 관련 인물 모음

뚝틀이 2009. 2. 24. 11:17

재 작년 4월 어디에선가 스크랩했던 내용인데, 그 어디에선가가 기억이... 하지만, 지금 미국 자동차회사들을 보며....

 

 

노스트라다무스 : 자동차를 예언했던 의사

1550년경에 살았던 프랑스의 의사였던 노스트라다무스는 놀랍게도 자동차에 대한 예언을 하게 된다.

그의 예언에 따르면 쇠로 만든 말이 미래에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카로(Carro)라 불리게 될 것이며 카로를 열광하는 젊은 카로마니(Carromanie)들이 그것에 열중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과연 1886년 독일 사람들이 실용적인 자동차를 발명하여,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포드 모델 T' 라는 값싸고 튼튼하고 운전하기 쉬운 카로(그 후 이 단어가 줄여져 Car)를 대량 생산하게 되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적중시켰다.


아르망 프조 (Armand Peugeot) : 프랑스 최초의 가솔린차를 만든 명문

벤츠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푸조 자동차 회사를 세운 아르망 푸조는 나폴레옹 시절부터 4대에 걸쳐 이어오던 명문 푸조 가문 출신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푸조 자동차를 설립하여 엔진을 차의 앞에 얹는 새로운 모양의 차를 디자인하였으며, 자동차 사업이 성공하려면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여러 자동차 경주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성장하게 된다.

DOHC 엔진을 처음 개발하였으며 2차 대전 중에는 나치 군에게 체포당하여 총살형을 선고받지만 자동차 설계의 천재라던 독일의 포르쉐 박사에게 발견되어 석방되기도 한다.

95년 동안 푸조 자동차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푸조의 철학인 '변함없는 품질과 깊은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앙드레 미쉘린(Andre Michelin) : 타이어를 고안한 자전거포 주인

1894년 가을 자전거용 바퀴의 타이어를 만들어 팔던 앙드레 미쉐린에게 한 청년이 공기식 고무 타이어를 고치게 된다. 이때 미쉐린은 이것을 자동차에 응용하기로 착안하고 자전거 타이어를 본떠 자동차 바퀴용 고무 타이어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1948년 자동차 타이어의 개척자인 미쉐린 타이어 회사가 지금 대중화 된 래디얼 타이어를 개발하게 되어 이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루이 르노(Louis Renault) : 자동차의 풍운아

어려서부터 기계를 다루는 일이라면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던 루이르노는 13세 때인 1890년 당시 전 유럽을 놀라게 했던 세 르플레의 자동차를 타보고는 홀딱 반해 자동차를 만들 것을 결심하게 된다.

1898년 군에서 제대한 루이르노는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컸던 드디옹-부롱 자동차회사에서 3륜 자동차 한대를 사다가 이것을 개 조하여 루이 1호를 완성한다. 이 루이 1호는 프로펠러 샤프트라는 추진축과 디퍼렌셜 기어라는 차동장치로 뒷바퀴를 구동시키는 자동차였다.

이 구동장치는 오늘날 자동차들이 가지고 있는 구동장치의 시조가 된다. 1899년 그의 두 형을 설득하여 르노 형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고 파리 산업박람회에 출품하여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여 최초로 지붕 있는 자동차를 생산하여 파리의 여인들로 부터 대 환영을 받게 된다.

1944년 세상을 떠나기 까지 르노 형제는 각종 국제 자동차 경주에 참가하여 많은 기록들을 내게 되고, 르노자동차는 1960년대 후 반부터 창업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스포츠카를 만들어 랠리, 그랑프리 등 국제 레이스에서 지금까지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칼 벤츠(Carl Benz) : 자동차의 아버지

칼 벤츠는 오늘날 성공한 사람만이 타볼 수 있다는 서독 벤츠 자동차의 창업자이다.

칼 벤츠는 13세 때 과학실에서 증기기관차를 보고 매혹되어 철도가 없이도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드는 꿈을 키우게 된다.

몇 번의 사업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던 벤츠를 헌신적인 내조로 돌봐준 그의 아내 베르타의 덕분으로 1879년 그는 세계 최고의 가솔린 엔진을 발명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동차를 만들 돈이 없었다. 그러다가 만 하임 재판소의 전속 사진사인 에밀 뷜러가 이 엔진을 보고 매우 촉망 되는 장래의 사업이 될 것으로 보고 엔진의 생산 자금을 지원하게 되어 비로소 자동차를 생산하게 된다.

주민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행되었던 로드 테스트 덕분으로 차츰 벤츠의 자동차는 기계적인 결함을 고쳐나갔으며 차츰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25년 경제공항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동차의 작은 아버지라 불리는 다임러 회사와 합병해 다임러-벤츠 자동차 회사로 바뀐다.

1929년 칼 벤츠는 85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루돌프 디젤(Rudolph Diesel) : 디젤 엔진을 발명한 비운의 발명가

독일의 발명가였던 루돌프 디젤 박사가 1894년에 발명한 디젤엔진은 휘발유 엔진보다 높은 경제성과 열효율 때문에 19세기말 일 대 혁명을 일으킨다.

독일 왕실학교에 입학하던 첫날 과학실에서 강력한 공기 압축력으로 불을 일으키는 기구를 발견하고 깊은 흥미를 가지게 된다.

벤츠나 다임러가 발명한 가솔린엔진 자동차의 단점을 파악한 디젤은 불나기 쉬운 가솔린 엔진을 대신 할 수 있는 엔진으로 적합 한 것이 바로 공기 압축 점화식 열 엔진이라고 믿고 연구에 정열을 쏟은 결과 1894년 2월 드디어 엔진의 실린더 내에서 공기를 강제로 압축시켜 얻은 높은 열에 의해 연료를 점화 폭파시키는 '열 엔진'을 발명한다.

가솔린엔진과 증기엔진 제조업자들 간의 시기와 모함 중상모략 등이 심해졌으며, 회사 내 간부들의 재산을 둘러싼 암투, 부정, 부패 등으로 정신 착란증이 심해져 1913년 9월에 영국에 세워진 디젤엔진 공장의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탄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게 된다.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 자동차 설계의 세기적 천재

히틀러의 부탁을 받고 만들어내 딱정벌레를 닮은 자동차 폴크스바겐과 현대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는 독일의 포르쉐는 자동차 설계의 천재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걸작이다.

1875년 9월 3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민지였던 북부 보헤미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전기를 좋아했던 포르쉐는 15세 때 자기 집안에 전등불을 만들어 그의 집은 보헤미아에서 최초로 전등불을 켠 집으로 유명하게 된다.

비엔나 공업대학의 청강생으로 공부하던 어느 날 빈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세계 최초의 가스 자동차였던 지그프리드 말커스의 자동차(1874년 발명)를 보고 자동차 설계의 꿈을 갖는다. 그는 다임러 자동차 회사에서 많은 자동차를 디자인하게 되며 다임러와 벤츠가 합병된 뒤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메르체데스 벤츠 K,S,SS,SSK,SSKL 등을 만들어 내었고, 그중 벤츠 SSKL은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유럽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던 차이다.

1930년 55세가 된 포르쉐는 자기 자신의 독립 업체인 포르쉐 설계회사를 차려 히틀러로부터 부탁받은 딱정벌레 형 국민차 폴크스바겐을 만들게 된다.

1948년 폴크스바겐과 모양이 비슷한 2 인용의 소형 스포츠카 포르쉐 318을 만들어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1951년 뇌일혈로 쓰러져 스튜트가르트의 마리안 병원에서 사망한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 국민차를 만든 악마

독일을 경제공황으로 부터 번영으로 이끌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게르만 제국을 만들겠다는 정치이념이 성공해 1933년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약속한 자동차 전용 도로인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모든 독일 가족들이 이 도로를 타고 달릴 수 있는 독일 국민의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1937년 1600Km 의 아우토반을 완성하게 되며, 포르쉐 박사로 하여금 독일 국민차를 만들게 한다.

1936년 포르쉐 박사는 딱정벌레형의 차를 히틀러에게 납품하게 되고 히틀러는 독일의 여러 자동차 회사로 하여금 이차를 생산하게 한다.

이 차를 독일 국민들은 폴크스바겐(Volkswagen 국민의 차)라 불렀고 이 차는 1975년까지 모양을 한번도 바꾸지 않은 채 세계 자 동차 역사에 없었던 1900만대를 만들어 최고의 생산 기록을 올렸다.


조반니 아넬리(Giovanni Agnelli) : 피아트 왕국을 만든 기마장교

1866년 이탈리아 빌라페로사란 곳의 부유한 상류가정에서 태어난 조반니 아넬리는 1899년 귀족 은행가등 친분이 두터운 8인의 토리노시유지들을 만나 대형 자동차 회사를 만들기로 합의하여 토리노 이탈리안 자동차 회사

(Fabbrica Italiana Automobili Torino)라는 긴 이름의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다.

그후 1917년 머리글자를 따서(FIAT)자동차 회사로 고쳐 부르게 되는 이 회사는 이탈리아의 산업발전에 큰 공헌을 해왔다.

조반니는 30대의 왕성한 정력과 추진력 그리고 예민한 사업 판단력과 리더십을 발휘해 피아트 회사는 처음부터 급성장한다.

1923년 조반니는 옥상에 자동차 트랙이 있는 서울역 10배 크기의 5층 공장을 세계 최초로 가장 크게 짓는다.

1930년 조반니는 미국의 헨리 포드와 친분이 깊었다. 미국에 갈 때마다 포드공장을 찾아가 헨리포드에게 귀빈 대접을 받았으며, 사업에 관한 의논을 주고받았을 만큼 포드의 영향도 크게 입었다.

일찍 죽은 두 자식들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는지 그의 생전에 많은 사업을 하였으며 특히 근로자들의 복리증진에 힘을 쏟았다. 2 차 대전의 패전으로 타격을 입은 조국 이탈리아를 뒤로하고 1945년 12월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빈센초 란치아(Vincenzo Lancia) : 명차를 만든 경리사원

1881년 9월 이탈리아 포벨로라는 마을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빈센초 란치아는 회계학을 공부한다. 그러나 17세 되던 해 빈센초는 회계학을 중단하고 자동차 공장에 취직한다. 이곳에서 기술이 없던 그는 경리로 일을 하면서 자동차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는 19세 되던 해에 피아트로 옮겨 피아트 자동차 회사의 검사 부장이 된다. 1900년에 일기시작한 자동차 레이스 붐이 란치아를 사로잡았다.

란치아는 10년 동안 20여 차례의 레이스 우승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1906년 동업자안 크라우디 오포고린과 피아트를 떠나 란치아 자동차 회사를 세운다.

25세의 젊은 사장이 된 란치아는 이탈라라는 자동차 공장을 사들여 공장을 늘리면서 자동차의 기술 분야와 제작 분야를 직접 담당 하고 동업자 크라오디오 포고린은 판매를 담당한다.

1922년 란치아는 람다라는 란치아 최대 걸작을 만들게 된다.

이 람다는 오늘날 승용차가 가지고 있는 앞 스프링 구조로 앞 두 바퀴가 제각기 상하로 움직이는 독립 현가식 스프링 구조였던 것 이다.

란치아는 이 람다를 계속 발전시켜 오늘날의 안락한 승차감을 가진 승용차를 만드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고 1937년 세상을 떠났다.


엔초 페라리(Enzo Ferrari) : 스포츠카의 영웅

90평생을 세계 카 레이스 발전과 최정상급의 스포츠카 만들기에 일생을 바쳤던 외고집통의 엔초 페라리는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국보적인 인물이다. 엔초 페라리는 1898년 이탈리아 북부 작은 도시 오데나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가 구경한 카레이스가 소년 페라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고 만다.

카레이서의 꿈을 키워 가던 페라리는 1924년 무솔리니가 후원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코파아체르보 레이스에 출전해 당시 유럽 최대 강적이던 독일의 벤츠 SSK를 물리치고 우승해 이탈리아 내에서는 그를 당할 자가 없을 만큼 급성장하게 된다.

1936년 페라리는 자신의 카 레이스 회사인 스쿠데리아 페라리 사를 설립해 일류레이서와 기술자들을 끌어 모아 웅지의 날개를 펴게 된다.

1947년 드디어 페라리는 모데나에 페라리 스포츠카 공장을 세우고 레이스카를 만드는 한편 본격적으로 스포츠카 제작에 뛰어들어 첫 작품으로 페라리 166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페라리 자동차의 진가가 세계정상이던 그랑프리 레이스와 르망 레이스에서 발휘한다. 창립한 1947년부터 지금까지 5만여 대를 만들었지만 명품 중의 명품으로 엔초 페라리의 전설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다.


리차드 트레비딕(Richard Trevithic) : 최초의 승용차를 만든 리차드 트레비딕

1803년 영국의 젊은 기술자였던 리차드 트레비딕은 비로소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역마차 모양의 8인승 승용차를 최초로 만들었다.

이 차는 방향을 잡는 자전거식 앞바퀴 핸들과 직경이 3.2M나 되는 두 개의 뒷바퀴를 가진 차대 위에 8인승 마차 객실을 얹은 높다란 차였다.

트레비딕은 자신의 차를 달리게 할 레일을 깔고 그 위에 차를 얹어 달리게 했다.

이렇게 자동차가 둔갑해 오늘날 기차의 선조가 되었다.

흔히들 기차는 1814년 영국인 기술자 조지 스티븐슨이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트레비딕이 기차를 먼저 발명했다.

다만 그는 특허를 받지 않아 발명가의 영광을 안지 못했을 뿐이다.


찰스 S. 롤스(Charles S. Rolls), 프레드릭 H. 로이스(Frederic H. Royee) : 영국자동차의 자존심

영국의 옛 영화와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이 있다면 세계에서 가장 우수했던 귀족풍의 자동차인 롤스로이스밖에 없다고 한다.

프레드릭 로이스는 1865년 3월 영국 랭카셔 주의 앨월튼에서 조그만 제분소를 경영하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세가 어려워 4살 때 런던으로 이사했으며 9살 때부터 돈벌이를 해야만 했다.

잘살기 위해서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 생각한 로이스는 낮에는 전기기술을 배웠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 나가 공부를 한 덕분에 훌륭한 전기기술자가 되었다.

전기 제품사업으로 성공한 루이스는 1902년 자동차에 흥미를 가지고 프랑스제 10마력짜리 '데까비'라는 중고 자동차를 구입해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런데 이 차의 성능이 너무 좋지 않아 직접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1903년 12월 자신이 설계한 승용차를 완성하였으며, 이차는 여러사 람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1904년 런던 사교계의 왕자이면서 부자였고 자동차 판매 술에 능숙한 롤스는 차의 판매를 담당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기술자 로이스는 제작을 맡는 롤스로이스 자동차 회사가 창립되었다. 롤스와 로이스의 자동차 회사 롤스로이스는 영국의 귀족들에게 인기 있는 차이기는 하였지만 그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1차 대전 중 로이스는 비행기 엔진 개발에 착수하게 되고 이것은 1차 대전 중 용맹을 떨치던 영국 공군의 이글, 팔콘, 호크등 전투기의 90%에 달했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롤스로이스 항공 기 엔진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윌리엄 찰스 모리스(William C. Morris) : 모리스 제국의 주인

1877년 옥스포드에서 태어난 모리스는 생계가 어려워 15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옥스포드에 있는 자전거포에 취직해 기술을 배우며 자전거 경주에서 자주 우승하게 되자 점차 이름이 알려졌다.

1897년 독립을 결심하게 되고 자전거포를 열어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만들어 팔다가 1904년 자동차를 판매하게 되며 1912년 모리스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모리스는 값싸고 가벼운 차를 만들기로 계획하고 그의 자전거 공장을 자동차 공장으로 바꾸고 엔진을 포함한 모든 부품들을 여러 전문 업체에 주문해 들여온 다음 조립해 팔았다.

경쟁사와의 경쟁을 위해 차량가격을 대폭 낮추는 등 영국자동차 산업의 고독한 풍운아이며 독재자였던 모리스는 영국정부가 모리스와 오스틴을 합병해 국영인 영국 자동차 합자회사를 설립하자 큰 충격을 받고 병으로 고생하다가 1953년 세상을 떠난다.


헨리 포드(Henry Ford) : 자동차의 왕

미국 역사상 20 세기 전반에서 가장 미국적인 인물을 뽑으라면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과 자동차 왕 헨리포드이다.

헨리포드는 1863년 디트로이트 부근 디어본에서 태어났다. 포드가 13세 되던 1876년에 아버지와 마차를 타고 디트로이트에 갔다가 이야기로만 듣던 증기자동차를 보고 홀딱 반해 버렸다.

16세 되던 1876년 포드는 청운의 뜻을 품고 디트로이트로 가서 여러 공장을 거치면서 필요했던 엔진 기술을 습득한 포드는 자기 자신의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1893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드디어 2기통짜리 엔진을 부엌 싱크대 위에서 완성한 후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1896년 5월 드디어 최초의 2기통짜리 포드 자동차가 완성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디슨은 10년이나 아래인 포드를 격려하였다. 이때부터 발명왕과 자동차왕은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1903년 6월 자본주들의 자본을 모은 15만 달러로 포드자동차 회사를 정식으로 발족 시켰다.

포드는 이 회사를 세우면서 혼성주주제 라는 새로운 창업법과 경영법을 도입한다.

회사의 일정지분을 투자자에게 배분하는 방법으로 남의 기술과 돈, 그리고 공장과 기계시설을 이용해 차를 만들었던 것이다.

경쟁사를 이기는 길은 자동차를 서민들이 생활에 이용할 수 있도록 값이 싸고 실용적인 차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 포드는 1908년 혁명적인 자동차 포드 T형을 개발한다.

이 포드 T형은 1927년 단종 될 때까지 1.500만대를 만들어 20세기 전반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독점한 자동차 왕이 된다. 1947년 84세의 나이로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헨리 릴랜드 (Henry m.leland) : 정밀 기술로 만든 캐딜락

시대와 관계없이 전통과 품위가 있는 세계 3대 최고급 자동차를 꼽으라면 영국의 롤스로이스, 독일의 벤츠와 미국의 캐딜락을 들 수 있다.

헨리 릴랜드는 1843년 영국에서 이민 온 소장수의 아들로 미국 버몬트에서 태어났다.

12살 때부터 정밀가공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24세 때 자신의 정밀가공공장을 디트로이트에 세워 부와 명성을 얻는다.

정밀기술의 대가였던 헨리 릴랜드는 같은 모델인 경우 부속품을 서로 바꿔 끼워도 문제없는 부품 호환성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마침 헨리포드가 세웠던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자금난으로 매각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회사를 인수해 1902년 릴랜드의 첫 자동차를 만든다. 이 자동차가 그 유명한 캐딜락 1호차 인 것이다.

1903년 자신의 승용차 공장인 캐딜락 회사를 세우지만 캐딜락을 GM의 간판 차종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GM에 매각한다.

그는 1917년 다시 링컨 자동차 회사를 세워 링컨 1호차를 만들지만 이 회사를 1922년 헨리포드에게 넘긴다.

핸리 릴랜드는 이렇게 미국의 고급차를 만들어 일생동안 남에게 좋은 일만 해주고 1932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월터 크라이슬러 (Walter P.Chrysler) : 유명하고도 위대한 실패작

1875년 미국 캔자스 주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월터크라이슬러는 18세 되던 해 철도수리공의 견습공으로 취직되면서 기차를 보고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기차회사의 견습공 시절에 자기가 애용하는 공작 도구를 거뜬히 만들어 기계에 대한 재능을 발휘한다.

크라이슬러도 포드나 GM과 같은 자동차 왕국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키워 가던 중 맥스웰 차머즈 자동차 회사를 500만 달러에 인수 해 모든 것이 새로운 크라이슬러 6이라는 첫차를 내놓았다.

이차는 높은 압력에 6기통 3300cc의 조용한 엔진, 에어크리너, 교환 할 수 있는 오일 필터, 4바퀴 유압 브레이크 등 이차가 나오기 전의 다른 차들은 이러한 장치들이 없었다.

그러나 1943년 가장 유명하면서도 위대한 실패작으로 끝난 "에어플로우"로 인해 위기를 맞는다.

이 위기를 크라이슬러는 시대유행에 맞는 차의 생산으로 극복하여 크라이슬러 자동차회사는 1950년까지 미국 제2의 자동차 회사로 자리를 지켰다.

1946년 8월 월터크라이슬러는 미국인들의 꿈을 실현시켜준 명성을 안고 6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어코카(Lee Iacocca) : 신화의 사나이

본명이 안소니 아이어코카인 리 아이어코카는 1924년 10월 펜실베니아 주의 알랜타운에서 태어났다.

핫도그 사업으로 돈을 모은 아이어코카의 아버지는 아이어코카가 4살 되던 1928년 렌트카 회사를 세운다.

어린 시절 포드 차와 같이 자라나 포드 차에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포드 차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포드의 사원이 되면서 아이어코카는 기술직 보다는 판매 분야로 갈 것을 결심하고 펜실베니아 주 남부지역의 판매 관리를 맡았다.

여기서 아이어코카는 부담이 큰 계약금이나 월부금액을 장기할부를 실시해 대히트를 기록한다. 1956년 말 아이어코카는 포드의 트럭과 승용차 판매총괄전무로 승진하여 천부적인 마케팅 아이디어를 동원하여 크게 실적을 올린다.

1966년 드디어 포드회장의 인정을 받아 포드자동차회사의 총괄 부사장으로 승진한다.

유럽과 미국에서 리 아이어코카 사장의 인기가 치솟아 포드의 회장 자리까지 넘본다는 설이 나돌아 1978년 포드 2세 회장의 질투로 강제파면을 당한다.

이무렵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는 도산 직전의 참상을 겪고 있었다.

크라이슬러는 마지막 방법으로 때마침 포드에서 쫓겨난 경영의 귀재 리 아이어코카에게 구원을 청한다.

1978년 11월 크라이슬러로 자리를 옮긴 아이어코카는 우선 계열 기업의 21개를 정리하고 18만 명의 종업원 중 5만 명을 해고하는 등의 경영 혁신을 감행 한다.

아이어코카는 1980년 초 크라이슬러 차의 새로운 보증 제도를 발표한다.

차를 산 고객은 30일 후 또는 1600Km를 달린 뒤에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 값을 전부 돌려준다는 것이다.

이 캠페인이 성공하자 다음에는 5년간 또는 5만 마일(8만km)까지 보증 한다는 제도로 보증 제도를 바꾸어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1884년 그의 자서전 "아이어코카 자서전"이 출판되자 6개월 안에 170만부가 팔려 세계를 휩쓸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