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 대한 내용이 하도 어려워 인터넷을 뒤지다가 김영근이라는 분의 글을 만나게 되었는데, 하도 좋아서 따옴.
앞부분 생략,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들에게는 위대한 자기존중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칸트(1724-1804)의 삶과 철학에는 바로 그런 종류의 감동이 있다. 칸트는 동시대인들에게 철학의 영역에서 불패의 신화를 이룩했다고 평가받았다. 칸트가 파괴한 것은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그가 확립한 것은 결코 파멸하지 않는다.(훔볼트)
그러나 그 역시 처음부터 잘 나가는 철학자는 아니었다. 칸트는 마흔 여섯의 나이로 간신히 교수직을 얻었다. 16년간의 오랜 시간강사 생활 끝에 취직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유럽 최고의 학문 수준을 자랑하는 대학도, 독일 유수의 대학도 아니었다. 황제가 그곳을 방문하고 나서 대학이라기보다는 곰 사육에나 더 적당한 곳이라고 품평했을 정도로 지방 소도시의 그저 그런 대학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칸트는 철학사상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인 순수이성비판을 썼다. 그가 쉰일곱 살이 되던 해인 1781년에 출간된 저작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그는 11년간 아무런 학문적 업적도 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비난에 찬 조바심으로 늙은 철학자를 괴롭혔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칸트의 학문적 능력을 의심했을 때 그가 흔들렸다면? 남들에게 무언가 증명하기 위해 1,2년 만에 비판을 급조했다면? 아마도 심오한 통찰이 담긴 고전 대신 고만고만한 철학서들의 저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용감한 자기존중의 정신은 일생동안 그의 삶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비판의 문제의식에도 그대로 녹아들었다.
칸트의 선배 철학자들은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을 알 수 있는가?
라이프니츠는 전부 다 알 수 있다고 독단주의적으로 답한다. 흄은 전부 다 모른다고 회의주의적으로 답한다.
자신 없는 사람들은 유럽 지성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어진 두 입장 중 하나를 서둘러 택해야 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칸트는 완전히 다르게 물었고, 그래서 천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다 알 수 있다고 자만하지도 말고 전부 다 알 수 없다고 절망하지도 말자.
순수한 이성은 어디까지 알 수 있고 어디부터 알 수 없는지를,
즉 순수이성의 능력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따져 묻자.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의 의미이다.
이러한 비판 정신을 통해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식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를 따라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이다.
간단히 말해 인식의 외적기준을 내적기준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내적 기준이 자의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끈질기게 탐구했다.
칸트의 비판은 인식이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비판을 수행했다.
푸코는 칸트를 위대한 계몽과 성숙의 철학자라고 평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비판은 자신의 한계를 분석하는 동시에 그러한 한계들을 넘어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는 태도, 에토스, 철학적 삶이다.
모두들 알고는 있다. 비판은 언제나 자기도취와 절망을 넘어서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을. 그러나 비판을 통해 진정 무언가 성취할 수 있는 자는 자기존중의 용기를 가진 성숙한 자들뿐이다. 사실상 우리 사회에 만연하는 성급한 업적주의는 자기불신과 거기서 비롯되는 무비판적 태도의 산물인 것이다.
칸트가 지금 인터뷰 요청을 받는다면 뭐라 말할까? 그는 200년 전 독일인들에게 권고했던 것을 다시 되풀이할 것이다. 학연과 지연을, 모든 외적 권위를 벗어 던지고 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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