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뚝틀이 2009. 3. 29. 10:22

27세에 ‘통일혁명당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수로 투옥된 후 영어의 몸으로 지내며 쓴 이분의 편지글에 어찌 무슨 견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지난 번 ‘강의’에서도 이미 이분 생각의 깊이를 접한 적도 있는 마당에.

그저 책 속에 나오는 주옥같은 생각의 일부를 따볼 뿐이다. 그의 편지사진에 찍혀있는 ‘檢閱畢’ 그 푸른 도장을 의식하며.

 

- Das beste sollte das liebste sein.

 

-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물질의 운동양식이라면 나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바위처럼 풍화당하는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

 

- 나는 벽 앞에 정좌하여 동공을 나의 내부로 열기로 하였습니다. 내부란 과거와 미래의 중간입니다.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고, 현재를 자위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색이 머릿속의 관념으로서만 시종하는 것이고 보면, 앞뒤도 없고 선후도 없어 전체적으로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의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 나는 인간을 어떤 旣成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이란 부단히 성장하는 책임귀속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 출석부의 명단을 죄다 암기하고 교실에 들어간 교사라 하더라도 학생의 얼굴에 대하여 무지한 한, 단 한 명의 학생도 맞출 수 없습니다. ‘이름’은 나중에 붙는 것,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고 믿습니다.

 

- 순화교육시간에 인내훈련 대신 잡초를 뽑는다.

잡초가 무슨 나쁜 역할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잔디만 남기고 잡초를 뽑는다.

도시에서 자라 아는 풀이름 몇 개 안 되는 나는

이들도 모르는 풀을 뽑는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잡초가 된 풀을 뽑는다.

 

-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해야할지 생각해 봅니다.

 

- 노인들의 젊은이들에 대한 불만 중 가장 자주 듣는 것은 젊은이들은 일을 여기저기 벌여놓기만 하고 마무리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고 나중 할 일을 혼동하는가 하면 일손을 모아서 함께 해야 할 것도 제각각 따로따로 벌여놓기 때문에 부산하기만 하고 진척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가 어디서 온 것인가를 어는 좌상님께 여쭈어보았더니 한마다로 농사일을 해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른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농사일은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노동입니다. 일의 선후가 있고, 계절이 있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노동을 수고로움, 즉 귀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비하여 노인들은 거기에다 자신을 실현하고 생명을 키우는 높은 뜻을 부여합니다.

 

-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人性)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온다 하던 비 한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老炎)도 더는 버티지 못할 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의 추량(秋涼)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 하기는 봄이 올 때도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징역살이란 최소한 의식주가 해결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곳이기 때문에 바깥사회와 같은 치열한 생존경쟁이 없다는 기본적 특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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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교도소는 지옥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천국일리도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도소가 ‘밑바닥’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회의 밑바닥, 어떤 시대, 어떤 역사, 어떤 인간의 밑바닥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낮고 어두운 밑바닥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기에 걸 맞는 ‘철학’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낮은 밑바닥에 세우는 냉정한 시선과 용기가 요구됩니다.

 

- 뽑은 이빨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어느 날 운동시간에 15척 담 밖으로 던졌습니다. 일부분의 출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