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끝나고 달려오는 아이들을 양 팔 활짝, 엄마가 맞고 아빠가 맞는다. 강인식 기자의 ‘사람·풍경’에 실린 큼직한 사진에서 진한 행복감이 묻어나온다.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의 엄마아빠가 되어준 윤익상·이명자 부부. 뭔가 큰데 한 군데 맞은 것 같다. ‘아직’ 이런 사람들도 있다니. ‘아직’ 우리사회에도 이런 샘물이 흐르는 곳이 있다니. 모두 자기 것 챙기느라 바쁜 줄 알았는데.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분들을 한 번 만나봤으면.... 신문사에 전화 걸어 주소나 알아보고 떠날까 하다가, 어느 세월에 그 사람들 출근할 때까지 기다리겠나 하는 생각에 무작정 차에 올라탄다. 강원도 영월 연덕리 비제비골?
제천에서 부터는 38번국도다. 국도라 하지만, 고속도로보다 훨씬 낫다. 시원하게 뚫린 왕복 4차선에 길도 아주 깨끗하고,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다니는 차도 거의 없다. 주변 경관 또한 보통이 아니다. 스위스가 어디 따로 있다더냐. 쌍용에서 그 국도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리고 또 달리니, 어느덧 연덕리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번지수도 모르고 길 찾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마주 오는 차 비킬 수도 없는 위태위태한 좁은 길 잘못 들어서기 몇 차례. 여기 저기 물어 그분 사시는 곳 겨우 알아낸다. 아이들 거둬 살고계시는 목사님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된다. 잘못 들어갔던 마을을 다시 벗어나 축사 사이로 빠져 한참 들어가니 저쪽에 교회가 나온다. 저기로구나. 돌을 쌓아 만든 아담한 교회 옆에 사택이 있는데, 놓여있는 신발이 없다. 어디 일 나가셨나? 계십니까? 톡톡 뚜드리자, 반쯤 열린 문으로 ‘젊은’분이 내다본다.
혹시...? 예, 제가 긴데요. 반갑습니다.
내미는 손이 ‘손’이 아니다. 글쎄 뭐라고 할까. 수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눠보았지만, 이런 손은 처음이다. 고개를 들어 다시 얼굴을 마주한다. 도시인이다. 바짝 마르긴 했지만, 세련된 도시인이랄까 지식인이랄까 뭐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그 표정엔 방금 그 손의 느낌이 진하게 묻어있다.
사실은...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지? 혹 내가 말 하나 잘못 고르면 아이들 마음에 상처나 안길 텐데.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며 묻는다. 아이들은요? 아, 예. 학교에 갔죠. 그렇구나. 오늘은 학교 가는 토요일인 모양이구나. 다행이네.
오늘 신문에 난 목사님 이야기를 읽었거든요. 네? 그래요? 우리얘기가 신문에? 예, 우선 들어나 오시죠!
뭐 한 잔 드시겠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도 그는 안쪽으로 가서 달그락 소리를 낸다.
방 한 가운데 낡은 식탁, 벽 쪽엔 서울 누구도 쓰지 않을 법한 낡은 컴퓨터, 어린이 동화책 몇 줄이 꽂혀있는 더 낡은 책장, 그 모든 낡음 속에 예쁜 표정 아이들 사진이 걸려있다. 지렁이라는 동시도 액자에 걸려있다. 다섯 살 때라고 쓰여 있다. 그 나이 또래 어린이 말투 그대로 쓴 거기에 함께 그려 넣은 그 지렁이들도 귀엽다.
종이컵에 담긴 두 잔을 내 놓으시기에 감사합니다하며 손에 잡는데, 기도를 시작하신다. 어이쿠. 내 참 여기 목사님 댁에 온 거지. 한 참 기도가 계속된다. 얼떨결에 꿇은 동작에 무릎근육이 얼얼하게 당겨올 때쯤 돼서야 아멘이다.
예전엔 아마 교회에 다니셨죠? 직업의식은 속일 수 없는 법.
걸쭉한 율무차 같은데 그 속에 또 무엇이 담겨있어 씹히는 맛이 제법이다.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을 한 번쯤은 뵙고 싶어 이렇게 왔다는 말을 다시 한 번 하는데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이럴 때 좀 더 분위기에 어울리게 인사말을 꺼내는 방법은 없을까?
어렸을 적 여러 가지 병이 동시에 겹쳐 절망적이었다고. 그래서 그때 고등학생 때, 살려만 주시면.... 그렇게 나은 후 목회의 길로 나서게 되었는데, 교인 중 하나가 간질환자로 밝혀지면서 사람들이 ‘무서워서’ ‘께름칙해서’ 다 떠나고, 가진 것도 바닥나고, 결국 집세도 낼 수 없게 된 그 교회를 비워줄 수밖에 없었다고.
그 일로, 자신의 길은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금년이 11년 째. 아침에 읽었던 그 기사에서의 이야기와, 조금 전 느꼈던 그 험하게 거친 손의 모습이 겹쳐지며, 그간 그의 생활이 어땠는지 아픔으로 다가온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물 불어난 개울을 비닐에 옷 넣고 건넌 후에 딸에게 옷 입혀 학교 보내고, 비닐하우스 속에서 촛불 켜고 밤을 이겨내고, 여름엔 농사, 겨울엔 강원도 충청도 장날 따라다니며 뻥튀기 장사,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형편이 나아지자마자’, 버려진 젖먹이, 엄마 아빠가 헤어지게 된 아이들, 가정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학대받던 아이들을 거두어 엄마와 아빠로 함께 지내고 있단다. 그것이 자신의 길이란다. 지금은 기계로 농사지을 수 있을 정도의 형편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고.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 하시는 분 참으로 많다, 자신은 부끄럽다는 이야기가 자꾸 반복된다. 이분의 꿈은 이보다 더 고생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정말 아직 부끄러운 그런 상태란 말인가?
세상 사람들 욕심으로 하는 일엔 남과의 비교가 그 근본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분이 하시는 이런 선한 일에 비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절대가치가 선하면 상대적 평가는 무의미한 것 아닌가. 부끄러운 건 나다. 바로 나다.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인사하면서, 뒷걸음질로 물러나온다.
'뚝틀이의 생각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Plagiarism? 오해와 이해는 종이 한 장 차이? (0) | 2010.03.09 |
---|---|
인간스러운 전자 (0) | 2010.03.08 |
高哥네, 親哥네, 呢哥네 (0) | 2010.03.03 |
重心이 衆心은 아니지 않은가. (0) | 2010.02.27 |
이제 곧 새 생명의 계절이 (0) | 2010.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