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서울나들이. 오랜만의 문화생활. 바이올린 독주회에 다녀왔다. 드뷔시, 포레, 프랑크의 곡으로 꾸민 프랑스의 밤이었다고나 할까? 좋았다. 아주 좋았다. 아마추어의 표현은 대개 이렇게 단언적이다. 20대중반 청년처럼 화려했고, 50대중반 연주가에 걸맞게 완숙하고 철저했다. 연주 내내 눈을 감고 그 선율에 빠져들어야 했을 정도로.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던 생각. 연주가의 삶이란 무엇일까. 화려함? 어린나이에 동아콩쿠르 입상. 세인의 이목을 받는 화려한 경력에의 첫걸음이지만 또 동시에 족쇄이었으리라. 하지만 측은이란 단어가 문뜩 뇌리에 스친다. 이 연주가에게도 ‘보통’의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마음대로 뛰어놀고 싶어도 손가락이라도 다치면 어떡하나, 더 놀고 싶어도 이제 연습해야지, 때로는 심술도 부리고 어린아이답게 행동하고 싶어도 남이 보면 어떡하지.
얼마 전, 어느 음악가과 과학자 사이의 가시 돋친 대화를 목격한 적이 있었다. 왜 음악인들은 꼭 그렇게 높은 출연료에 집착하는가. 인생을 반납하고 그 희생의 대가로 얻은 능력인데 당연한 것 아니냐는 명확한 대답. 인생반납 자기희생이야 어느 직업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의외로 이야기가 길어진다. 정작 불만은 일반사회인식으로 향한다.
소프라노 한 곡 부탁하기는 그렇게 망설여지는데, 과학자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생각되는 그 현상. 정말 그럴까?
홀을 꽉 채운 청중 중 많은 젊은이들의 표정이 그의 제자임을 느끼게 한다. 다른 직업에서도 그럴까? 악보의 음표하나하나를 다 외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름난 대가의 같은 곡 녹음을 수없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그 제자들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스승의 모습. 이런 삶이야말로 바로 냉혹 그 자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음이 드러난다. 연주회 끝난 로비는 왁자지껄 장터였고 잔칫집 분위기였다. 홀 밖으로 나오는 그를 향해 환호성이 울린다. 그 제자들은 비평가가 아니었다. 스승의 솜씨를 부러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식구들이었다.
생각은 이내 그 다음단계로 옮겨진다. 이 많은 제자들 중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이, 아니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몇 이나 나올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 곡이 요구하는 기본흉내수준까지는 제법 여럿이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높낮이와 길이를 맞추느냐로 예술 운운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사람의 혼을 흔드는 천부적 소질은 수준급 연주가에 필수적이다. 음대학생 미대학생이 아무리 많아도, 정말로 이름을 빛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법.
하기야 다른 직업세계에서라고 어찌 다를 수 있겠는가. 화려한 조명을 받는 일부 특출한 사람들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수많은 보통사람들. 일전의 그 감정 섞인 언쟁장면이 다시 머리에 떠오른다.
출연료와 강사료? 그 관점이 어떻게 다르건 무슨 상관인가.
감성에 쏠리는 사람이 많으면 예술인이 더 우대를 받는 것이고, 사회가 힘들어지고, 이성이 그리워지면 과학자가 더 대접을 받는 것이고. 어차피 객관적 가치평가란 존재하지도 않고, 국가나 사회가 개입할 성질도 아니다. 어쨌든 어제는, 먼 길이었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것이 바로 가치고 보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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