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의 생각세계

영어를 잊어야 나라가 산다.

뚝틀이 2010. 4. 3. 21:20

복잡한 것을 생각할 때, 특히 여러 가지 요인이 얽혀있어 가닥조차 잡기 힘들 때, 그 성격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Gedankenexperiment, 바로 생각실험이다. 한 가지 한 가지 요인을 따로 분리시켜가며 그 요인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해나가는 것.

 

온 나라가 매여 있는 영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제 한 참 지나간 이야기지만, 어린쥔지 오렌진지 이런 유치한 건으로 그 누가 웃음꺼리 됐을 때,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까지 나서서 땡Q로 지원사격하는 그런 나라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나. 코미디다 코미디. 아니 커미디인가, 아니면 코메디?

 

이제 생각실험 한 번 해보자. 만일 미국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CIA가 민족정신을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운다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할 것 같은가. 누구에게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도 ‘한국말 못 쓰게 하기’일 것이다. 이미 비슷한 쓰라린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번엔 미국이니, 우리가 그 ‘국제어’를 ‘원어민’으로부터 배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환영일색일까? 모르긴 몰라도, 선생님들이 몰래몰래 국어도 가르치고 우리역사 이야기도 해주며 아이들 가슴속에 민족자긍심을 불어넣어주려 애쓸 것이다. 심훈의 상록수에서처럼 아이들도 그런 선생님 열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정신연령은 CIA가 바라던 그 유치한 영어교과서 수준이 아닌, 감춰놓고 배우는 ‘생각을 일깨워주는 국어책’의 고양된 수준에 이를 테니, 그 CIA 속이 타 대대적 세뇌작전 홍보전을 펴겠지. 정보전쟁에서 이기려면 영어가 필수적이라고. 경쟁국에 이기려면 영어에 전력해야 한다고.

우리의 엘리트들은 이때가 기회다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래? 우리의 진정한 경쟁국은 일본과 중국인데? 그럼 영어대신 중국어나 일본어를 배우는 것도 허락해달라고. CIA가 내뱉는 말. ‘모든’ 정보가 인터넷에 영어로 올라오는데? 어허, 그래? 말없이 일본글자 중국글자 우글거리는 웹 사이트 몇 개를 그들에게 보여준다. 할 말 없어 머뭇머뭇.

 

우리의 회사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토플점수로만 사원채용 강요하는 CIA요원 눈 피해가며, 전공실력 탄탄하고 생각 깊은 젊은이 찾아내려 무슨 수단이라도 다 쓸 것이다. 인사담당 부서에 떨어진 내부특명. ‘어떤 일이 있어도,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앵무새처럼 영어만 나불댈 줄 아는 앵무새 무뇌족들을 걸러낼 것!’

 

미국의 속국이 된 것도 아니고 CIA의 공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몇 장면 들여다볼까?

-엄마가 틀어주는 비디오 보면서 입 헤 벌리고 있다가, 단어 몇 개 따라하는 불쌍한 앵무새 신세 우리 아이들.

-엄마 아빠 주머니 탈탈 털어가며 어학연수 나갔다 주눅만 들어 고개 숙이고 돌아오는 초등생 대학생 저 군상들.

-강의의 본질은 잊어버린 채 검은 머리 교수에게 더듬거리는 영어강의 시켜놓고, 그것도 자랑이라 떠벌리는 웃기는 대학들.

-전공지식 그런 것 상관없으니, 그저 영어만 잘 배워오라고 토플/토익 점수로 사원 뽑는 저 정신 나간 자폭소원 회사들.

-일 잘해봐야 무슨 소용, 진급엔 영언데, 지하철에서도, 아이들 잠자리 옆에서도, 귀에 뭐 꽂고 책 들여다보는 저 처량한 아빠들.

영어, 영어. 딴 일 모두 접어두고 그저 모두 영어 영어다. CIA가 작전을 했더라도 이 정도로 철저하게 효과 볼 수 있었을까?

 

그래도 무한경쟁 국제경쟁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그럼 다음 생각실험단계로 넘어가자.

총칼 든 전쟁이라면 어떨까. 기본기에 충실한 병사 하나하나가 자기가 맡은 임무에 충실해야 전쟁에 이길 수 있다. 개개 병사가 적군의 말을 꼭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설령 생산제품 전량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회사가 있다하더라도, 모든 직원이 영어를 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영어 그런 거 상관없이 물건 잘 만드는 사람 아홉에 영어 잘하는 사람 하나 붙어있는 팀이 나은가, 아니면 그래도 열 명 모두 영어에 잠 못 이루는 그런 팀이 나은가.

 

영어도 잘하고 전공실력 좋은 그런 사람 얼마든지 있다고? 이렇게 생각해보자.

올림픽 선수촌에 들어온 젊은이들에게 ‘우선은 영어, 그 다음에 종목훈련’ 그런 지시 내리는 촌장이나 문체부장관이 있다면?

한 국가의 또는 한 민족의 자부심 척도인 올림픽 메달 수나 월드컵 순위 그것이 영어가 아닌 기초체력에 달려있듯이, 한 나라의 국제경쟁력 그것 역시 영어가 아닌 탄탄한 수학 과학 문학 철학 그런 것에 달려있는데, 올림픽보다 더하면 더하지 조금도 덜하지 않은 ‘물건싸움’이 다 피 말리는 시간싸움이요 사활을 건 머리싸움에서 나오는 것들인데, 그런데도 그 ‘메달레이스’를 준비하는 ‘우리 선수’들에게 우선은 영어 그 다음에 ‘딴 공부’ 이런 식 난센스 모습이 당연시되는 우리 ‘선수촌’을 이대로 내버려두는 교육과학무슨장관인가 하는 그 사람 직무유기 탄핵대상 아닌가?

 

‘대개’의 경우 영어 잘하는 사람이 다른 것도 잘한다고? 어디 배부른 스카이대학에 계시는 교수님 ‘커멘트’인가?

딴 것은 다 잘하는데, 유독 어학엔 재주가 모자라, 그 딴 것에 대한 재능까지 살리지 못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실제 그런 사람들 우리 주위에서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던가. 영어라는 괴물에 대한 스트레스와 열등감만 없다면 마든지 나래 펼 수 있는데도, 그 자부심 그 재능 슬그머니 날개 접게 만드는 이 현실 서글프지도 않는가.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는 스카이라면, ‘좋은 재료’ 납품받아 비싼 값에 넘기는 앉아먹는 장사가 아니라면, 입학시험에서 영어시험 따위는 자격시험 정도로 대체하는 것이 옳은 길 아닌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미국에선 거지들도 영어를 한다. 이건 농담차원이 아니다. 그쪽은 거지들도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로 에세이 쓰고, 중고등대학교거치며 영어로 토론한다. 그쪽은 거지들의 말에도 철학이 배어있는데, 우린 ‘피노키오’ ‘오즈의 마법사’ 그런 것 보며 그걸 따라가겠다고? 자기 것이 우선이다. 자기 생각이 우선이다.

 

그런데 여기 우리 이 사회에서는? 그 똑똑한 사람들이 쓴다는 신문들 제목 뽑는 것 한 번 보라. 맞춤법에, 문맥에, 정말 가관 아닌가? 그 똑똑하다는 은행원들 존댓말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는 것은? 자기 생각 제대로 문장에 담을 줄도 모르는 저 여의도 사람들은? 이것 다 그 불행했던 사춘기 시절 엉뚱한데 매달리고 그 논술훈련 기계적으로 달달 외우며 받았던 탓 아닐까? 자기 것 소중히 여길 줄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그런 ‘자긍심 부재’ 사람들이 국제는 무슨 얼어 죽을 국제!

 

실용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중국어나 불어 또 러시아어 일본어도 영어 못지않게 중요하다. 경쟁국의 실상은 현지 언어라야 더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또 있다. 물건을 팔려할 때, 통역 대동하고 온 사람과 자기나라 말할 줄 아는 사람. 어느 쪽에 마음이 더 가겠는가. 편식으로 튼튼한 체력 만들 수 없듯이, 영어 일변도로 국제경쟁력 키운다는 것은 발상자체부터 어불성설이다.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비록 영어는 부족해도 우리말 우리글로 사회를 이끄는 현자와 실력자가 우리를 살리겠나, 앵무새처럼 혀 잘 굴리는 원숭이가 우릴 살리겠나.

정책당국자들이여. 정말로 국제경쟁력 제고라는 시장주의가 교육의 뿌리까지 흔드는 것이 피치 못할 현실상황이라면, 수학 과학 역사의 비중을 더 높이고 영어의 비중을 낮추는 것이 옳은 길이라 생각지 않는가?

이 무한경쟁 시대에 탄탄한 경쟁력을 추구하는 회사들이여. 신입사원 뽑고, 승진시킬 때, 영어보다 더 기본적인 실력을 중시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이 살아나갈 수 있는 길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