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 과거 한 시절로의 추억여행을 한 느낌이다. 소설 ‘귀향’을 읽으며 그 스토리 전개에는 야릇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차분한 표현방법과 그 간결한 문체에 반해 이 작가의 책을 찾아보다 주문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책을 읽어주는 Vorleser'. 이번엔 사실 독일어로 읽고 싶었지만 유로화 강세 탓인지 유럽 물가 탓인지 그 가격에 놀라 얼떨결에 주문 클릭한 것이 이 영문판. 마지막 장을 덮으며 후회가 앞선다. 내 정말로 책 구입에까지 이렇게 비용을 따졌어야 했나 자책하는 마음에.
영화관이란 곳에 가본지 또 연속극이라는 것을 본지 몇 년이 아니라 거의 십년은 됐을 것 같은 비문화인 생활에 젖은 탓일까, 이런 책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그 발상이 놀랍기만 할 뿐이다. 생각의 흐름. 그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전부다. 무성영화 시절처럼 구성진 변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또 모를까.
약간 삐딱한 시각으로 보자면 ‘귀향’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 세계의 독자들이 또 한 번 이 독일 대학교 법학교수인 작가의 심리작전에 당한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책의 이야기 순서를 풀어헤쳐 다시 정리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불난 교회에 갇혀있는 유대인들. 외부로부터 봉쇄된 문을 열지 못하도록 하는 나치의 감시원들. 전쟁이 끝난 후 그 범죄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는데, 그가 몸이 약한 유대인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이상한 짓’을 한 후 그들을 ‘소멸 캠프’로 보내곤 했다는 그 화재현장에서의 유일한 생존자로부터 증언과, 그가 상황보고서를 꾸민 악랄한 주동자였다는 한 때 그 범죄현장의 동료였던 다른 피고인들로부터의 지목으로 결국 종신형에 처해지게 되는 여주인공 한나.
작가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뒤섞어가며 고도의 희석작전을 진행시킨다. 한나는 보고서를 쓴 주동자이기는커녕 사실은 문맹이었고 그가 약한 죄수들을 자기 방에 불러들인 것은 그들의 최후의 순간에 조금이라도 편한 상황을 만들어주려 자기에게 책을 읽어주게 한 것이었다고. 자기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고백만 한다면 그 모든 부당한 덮어씌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왜 자신의 그 ‘치부’가 드러내는 대신 그 ‘부당한’ 형량을 그냥 받아들이려하는지.....
주인공은 어떻게 그녀가 문맹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바로 소설가의 솜씨요 특권이다. 열다섯 살 소년 주인공 미하엘이 심한 병세로 길에서 쓰러지고, 지나가던 여인이 그를 자기 집에 데려가 씻기고 쉬게 해주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 며칠 후 그 집에 인사 갔던 소년 미하엘은 그 중년의 여인 한나에게 성적으로 끌리게 되고, 그 여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대가로 관계를 갖게 되고, 그런 일이 ‘오래’ 계속되던 어느 날 여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후에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나치범죄에 동조한 사람들에 대한 법철학적 평가 스터디 그룹의 일원으로 방청석에 앉았다가 피고석의 한나를 발견하게 되고..... 소설의 초점은 그녀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자존심에 맞춰지고, 죄수 그녀에게 주인공 미하엘은 계속 책을 읽은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를 반입시키고,.... 결국 끝에 가서 ‘어느 소설에서도 있음직한’ 그런 반전으로 이야기를 마무리가 지어지고.
내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란 생각이 든 것은 바로 ‘홀로코스트’가 엄청난 찬반논란 끝에 독일 공영방송을 탔던 그 당시가 생각나서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까지 할리우드 픽션이라 몰아붙이던 그들에게 이 홀로코스트 연속물이 방영되던 몇 주간은 독일사회 전체가 엄청난 충격파에 휩싸였고, 외국인으로서 거기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선 아주 위험하게 느껴지기까지 한 그런 분위기였다. 아주 가깝게 지내던 옆집 노부인은 ‘자신들도 전혀 몰랐던’ 그 시절 일에 대해 어떤 생각도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다고 그냥 눈물만 보일 뿐이었고, 결혼식에 친구대표로 유일하게 나를 내세웠던 그 친구까지도 ‘오늘 당장 그런 상황이 재현된다면 내 너를 보호해 주겠다는 그런 말을 할 자신이 없다’고 고백할 정도였고, 어쨌든 그 당시 내 주위에 있던 그 어느 독일인에게서도 ‘과거에 대한 반성’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지난 번 ‘귀향’ 오늘 또 이 'Vorleser'의 문학적 가치가 높으면 높은 만큼, 나치죄악 그 본질은 독자들의 머리에서 그만큼 희석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선 나 자신부터도 그렇지 않은가. 내 지금 역사적 사건의 무슨 평가서나 선악에 대한 교훈서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 문학적 관점에서 이 작품을 읽는 것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그 시대의 일에 또 한 번 접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래도, 내 이런 관점에의 ‘과민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만약 지금 내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서 일본 무슨 대학의 법대 교수가 쓴 이 비슷한 소설을 읽고 있다면 지금 어떤 기분일까 하는 그런 생각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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