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세일러의 '불편한 경제학'

뚝틀이 2010. 4. 23. 21:40

아고라 경방이란 아수라장 싸움터에서 그 분위기에 휩쓸림 없이 언제나 차분하게 편향됨 없이 견해를 밝히곤 하던 세일러란 필명의 논객. (처음엔 The Winner's Curse 또 Nudge를 쓴 Richard H. Thaler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이 책의 안쪽 표지에 보니 그냥 Sailor란다.)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가운 마음에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주문했다. 목적은 단 하나. 적지 않은 두께의 책에 펼치는 그의 ‘체계적 논거’는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정식으로 책을 내면서도 본명이 아닌 필명을 그대로 유지한 것을 보면 그가 ‘경제문제를 연구하는’ 학계의 일원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경제현상을 보면서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 눈높이에서 쓰인 책이기에, 또 처음부터 끝까지 문어체가 아니라 경어체로 일관하며 ‘공손한’ 태도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나가기에, 지금까지 읽었던 어느 책에서보다 더 친근하게 그의 주장이 가슴에 와 닿고 고개가 끄덕거려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싶은 그런 마음이다.

 

통화량이라는 것이 중앙은행에서 찍어내는 화폐의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은행을 통해 창조되는 신용의 양이라는 그의 평소주장을 시작으로 저자는 화폐의 역사에 대해 또 경제사적으로 중요한 통화정책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많은 공을 들인다. 그 후 ‘통념’이란 중간과정을 생략한 단편적 지식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한 후, 앞으로 인플레이션보다는 오히려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이 더 농후하고, 그 동안의 병폐를 터뜨리고 치유과정을 겪고 있는 미국이 ‘문제덩어리’가 아니라 오히려 부동산 거품을 더 키우며 통계수치까지 조작하고 있는 중국이 더 문제이고, 위험상태에 가장 먼저 빠질 가능성이 농후한 나라는 우리 한국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마치 얼굴을 맞대고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해주듯 풀어나가는 그 문장 그 도표설명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하고 힘이 실려 있어, 또 글 중간 중간에서 느껴지는 그의 건실한 생각체계와 신중하고 객관적인 분석자세 그 이유만으로도 내 원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책이다. 글쎄, 어떤 책을 읽고 설득 당했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어울릴까 싶지만 그래도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라 평하고 싶다.

 

追) 저자가 위기가 정말로 닥쳐올 것을 그리 확신한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그에 대한 '개인적 대비책'에 관심을 갖게 마련인데, 저자 역시 별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단지, 부채를 없애고,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풀뿌리 외환보유고를 높이는 운동에 동참하라는 극히 일반적 수준의 가이드라인 정도. 하기야 그 이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