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원제는 그저 간단히 'In Siberia'인데 그렇게 밋밋한 제목으로는 국내 독자의 시선을 끌지 못한다는 생각에 번역판 제목을 이렇게 붙였으리라. Colin Thubron이라는 작가에 매력을 느낀 것은 그의 '실크로드 240일(Shadow of the Silk Road)'을 읽고나서부터다. 사실 그 책은 2006년에 쓰인 것이었고, 이 책은 그보다 먼저인 1999년에 쓰인 것이니 순서가 바뀐 것이긴 하지만, 기행문에 순서가 무슨 상관이랴. 기행문이라하지만, 이 책엔 사진 한 장 없다. 또 어디 가면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원래 어쩌고 하는 그런 전형을 따르지도 않는다. 그냥 눈에 비친 모습 또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로 이어지는 일종의 사색여행 성격이 강한 책이다. 하지만, 산만하게 늘어지는 흐물흐물한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한 현장 탐방 르포의 진한 분위기가 살아있다. 옛 소련 붕괴 후 불행한 역사의 현장에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던 불쌍한 인간 군상들의 처참한 삶, 그 체제 붕괴와 함께 과거 한 때 원대한 꿈을 기억에 살리기조차 괴로운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자들, 또 전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흐름에 따라 인간 존엄성 그 최소치조차 누릴 수 없는 상태에서 소멸되어가는 야쿠트족 브랴트족 소수민족 그 사람들의 퇴락 모습,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그래도 그 속에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고고학자와의 대화, 노후를 대비해 열심히 저축했지만 엄청난 인플레이션이로 이젠 단지 빵 두 조각 값어치 정도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적금통장,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바이칼 호수 툰드라 타이가 등의 자연 모습과 어울어지며 펼쳐진다. 보통 사람도 쓸 수 있는 이야기? 전혀 그렇지 않다. 직설적 표현은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지만, 그곳의 자연환경 지정학적 특성 오지 중 오지 그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현지인보다도 더 자세히 알고 있을 정도로 역사탐구와 사전준비를 해놓은 그 철저함이 대화와 묘사 곳곳에 한 없는 깊이와 색깔을 더해준다. 전혀 감정을 섞어넣지 않는 차분한 흐름, 그 어느 곳에도 과장이나 비꼬음 또 지나친 은유가 없다. 감탄, 서글픔, 분노 이런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것이 바로 기자들의 본능에 숨겨진 웅변 아닐까. 또 하나 황의방씨의 탁월한 번역. 얼마나 자연스럽고 그 흐름에 막힘이 없는지 이 책이 원래는 외국서인데,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다. 역시 연륜이요 경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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