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남들이 날 어떻게 보나 그런 것까지 따져가며 산다면 얼마나 피곤하겠나. 난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 그대로 산다. 그게 내 삶의 원칙이다.
B: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또, 남들 눈에 비치는 나, 그게 사실 내 객관적 가치 아닌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 난 그런 쪽 삶을 추구한다.
어느 쪽이 옳을까,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물어본다면? 글쎄, 마음으로는 A쪽인데 실제로는 B쪽, 아니면, 원래는 A쪽인데 ‘어쩌다보니’ B쪽 뭐 대개 이런 식의 답이 나오지 않을까? ‘어쩌다 보니’란 쓴웃음 뒤에는 무슨 이유들이 있을까. 성장배경이 다르고 생존철학이 다른 사람들이 섞여있는 이 사회 이해관계에 따라 힘의 균형이 변해가는 이 사회에서 견디다보니 혼자 살 때는 몰랐는데 이제 가족을 지켜야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비교본능이라는 것이 뭐 그리 쉽게 떨어지던가, 그런 이유들? 그렇다면, 도대체 ‘남’들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나를 평가하는 ‘남들의 잣대’는 또 무엇이고.
다른 각도에서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들이 나올까. 자녀들은요. 아이들은 어느 쪽으로 키우시죠? 모르긴 해도, ‘보통의 부모’라면 대개 자기 아이가 A쪽보다는 B쪽에 속하는 것을 원치 않을까? 아이들 대부분이 A쪽을 원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B쪽 방향으로 설득하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자신의 경험에서? 그렇게 설득하고 싶다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낼까. ‘무엇 무엇에도 불구하고'라는 과정을 겪게 되는 그 '보람'이라는 것은 사실 무의미한 허상일 뿐, 실제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안정과 행복이라는 실상이지, 뭐 그런 식으로?
정말로, 보람이라는 것이 안정이나 행복의 하위개념이라 생각이 옳다면, 남들이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 또 아프리카 오지에서 몸을 던져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는 무슨 ‘잣대’, 그런 것이 있기는 있을까? 혹, ‘본능’의 속삭임은 이런 것 아닐까? 경제력, 즉 ‘돈’이라고. ‘남들의 눈’이라는 ‘객관적 잣대’는 바로 ‘돈’을 의미한라고.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그래왔다고. 다만,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이 천박하다 여겨지기에,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할 뿐이라고. 과연 그럴까? 우리가 잘 아는 두 가지 경우를 보자.
밤하늘의 별만 보며 걷다가 웅덩이에 빠진 사람의 우화, 발밑 현실은 보지 못한 채 먼 별만 쳐다보는 ‘얼빠진 인간’의 이야기, 2600년 전 Thales의 이야기. 사람들 조롱을 견디다 못한 그는 어느 해 ‘비싼 돈’ 약속해가며 그 도시 올리브기름 가계를 ‘몽땅’ 예약해버린다. 그의 예측대로 그 해 농사는 대풍, 애써 수확한 올리브 상할까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 값은 상관없이 기계 좀 빌려 달라 애원하는 그들에게서 ‘떼돈’을 벌어들인다. 악당? 천만에. ‘별 본다는’ 것에는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후 그는 다시 기하학과 천문학에 매달린다.
Isaac Newton. 막노동꾼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국왕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으며 누릴 것 다 누린 그. 조폐공사에서 일한 적도 있는 그이니, 얼마나 자신감에 차있었을까. South Sea Company라는 회사에 투자했다 주가가 배로 뛰자 잽싸게 팔아버린다. 하지만 계속 오르는 주가는 오르고, 자존심까지 상한 그가 이번엔 올인. 몇 달 만에 여덟 배까지 뛰었던 그 주식을 움켜쥐고 있다, 한 달도 안 돼 원래의 1/10가격으로 폭락하자 가진 돈 다 날려버린다. ‘우주의 법칙은 알겠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모르겠더라.’는 명언을 남기며.
아하! 무슨 이야기인 줄은 알겠는데, 그래도 난 솔직히 실속 없는 탈레스의 고고한 A모습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Sir라고 불러주는 뉴턴 쪽인데.(부러워할 것 없다. 개인적으로 그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떠나서 할머니 손에서 자란 그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해 주변과의 충돌이 잦았다. 그가 한 때 마술과 연금술에 빠졌던 것도 대인기피증까지 보였던 것이 하나의 이유라고) 물론 내가 탈레스라면 계속 올리브 아이템 그런 것 찾았을 테고, 뉴턴이었다면 절제 했겠지.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신문기사에서 접하는 각종 뉴스들, 그 내용들을 실제 내 생활에서 타산지석으로 삼고 있는가?
"우리 앤 어디 내놔도 기죽지 않거든요." 며칠 전 만난 젊은 엄마의 말이다. 자랑일까? 하기야, '기죽지 않는 아이'로 키우기라는 프로젝트도 있는 세상이니. 그런데, 기죽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혹 남들 눈에는 거슬리는 그런 행동도 장려하며 키우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누구에게 당하거나 친구들로부터 '왕따'당할 소지를 부모가 마련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남의 눈을 의식하는 B타입 쪽으로 너무 일찍부터 스트레스를 심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벤처업계를 상대하며 많은 사람을 보아왔다. 그쪽 사람들? 당연히 ‘기죽지 않는 아이’ 그쪽 카테고리다. 하지만, 마치 작곡가나 화가의 세계가 절대적으로 A쪽이지만, 그들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듯, 아무리 독창적 아이템으로 기죽지 않고 도전하더라도 ‘성공’의 맛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그 ‘초기성공’다음은? A타입의 유효구간은 거기까지다. 그 다음은 ‘세상진리’와 똑 같다. A와 B의 조화, 그것이 그 기업 생존여부를 결정한다.
스티브잡스나 빌게이츠가 ‘가고 나서’도 그 회사들 잘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면에선 우리의 세습재벌들은 ‘행운’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정치경제시스템’이 ‘세대교체라는 변신’을 ‘보장’해주고 있지 않은가. 어디 재벌뿐이랴. A방법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자녀교육을 통한 세대교체라는 가족변신’ 즉 부의 세습을 철저히 보호해주는 지금 우리의 ‘사회시스템’, 그것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守成, 이것이 오늘 우리사회 기득권층을 지배하는 풍조다. A와 B의 조화가 아닌, A->B의 변신. 당연한 것일까.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삶의 환경 그것은 끊임없이 변해간다. 변화와 반복, 일견 상충돼 보이는 이 둘이 물려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역사다. 큰 틀의 물결로 볼 때, 그 모양은 언제나 같다. A타입 사람들이 시대를 이끌어가며 큰 족적을 남기는 동안, B의 세계에서 어물쩍거리던 사람들이 도태되어 가는 것, 삶의 진리는 바로 그런 것이다. 변화와 반복 속에서의 요체를 이해하고 거기에 제대로 대응해나가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 그것이 이 세상 살아가는데 필수적 요건이다.
안정? 보람? 행복? 절대가치 지향적인가 상대가치 지향적인가에 따라 그 성격도 달라진다. 삶에 대한 태도가 그들을 정의하는 셈이다. 어느 쪽을 택해야 되나 그것은 각자 마음속에 담겨있다. 두다멜과 정명훈의 세계와 비슷하다며, 2NE1과 카라를 하나의 통 속에 집어넣고 생각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그 사이의 fine line, 그에 대한 생각은 결국 스스로 판단하고 정할 일이다. 가슴속 속삭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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