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한강의 '희랍어 시간'

뚝틀이 2011. 12. 1. 16:00

소설이라기보다는 '글'이다.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와 말을 잃은 한 여자, 이 두 주인공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음'과 ‘마음’이 움직이며 빚어내는 그림이다.

 

열일곱 살 때 이유도 없이 말할 능력을 잃은 적이 있었던,

이혼 후 양육권까지 빼앗기고 다시 말을 잃게 된 그녀, 실의에 잠긴 그녀가 선택한 것은 고대 희랍어 배우기.

어렸을 적부터 시력이 약해지다, 얼마 안 있어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는 남자,

‘눈에 띄는 외국인’으로 살기를 벗어나려 독일에 있는 가족을 떠나 돌아온 그가 택한 직업은 한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가르치는 선생.  

 

죽은 언어, 언어라기보다는 사색과 철학의 결정체로서의 희랍어.

말하는 능력을 잃은, 시력을 잃은 여와 남. '외부세계'와 멀리 떨어져나온 남과 여의  삶. 언어의 과거와 현재, 이 남녀의 과거와 현재. 

자기가 쓴 글씨지만, 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칠판 위 글씨지만, 자기의 말보다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그 글씨에 공포감마저 느끼는 선생.

이제 며칠 후면 먼 나라로 떠나가, 다시는 만날 수도 없게되는 아이를 그리는 엄마 그녀.

 

한 번 읽어보라는 선생의 말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수강생.

문법도 읽기도 관심이 없다. 그저 몇 단어 거기에 마음을 두곤 한다. 그녀가 만들어내곤 하는 시 구절들.

“선생님, 이 분이 희랍어로 시를 쓰셨어요.” 말에, 한 번 보여주기를 청하다,

말없이 나가버리는 그녀를 보고, 그때서야 그녀의 ‘문제’를 느끼고 수화를 시도하던 그.

 

어느 날 건물 안으로 날아 들어온 새. 검은 새. 어떻게든 밖으로 내보내려 애쓰는 그녀.

거기에 와 함께하다 계단에 헛디딘 발걸음에 안경을 밟고 피까지 흘리게 되는 그. 볼 수 없게 된 그와 말 못하는 그녀는....

 

아픔,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의 삶의 의미는? 작가 한강의 글 솜씨는 이미 다른 소설에서 익히 알고 있었다.

촉촉이 배어나는 그의 시와 글, 아니 작가의 ‘독백’이 만들어내는 그 '그림'.

읽는 내내 눈이 촉촉해진다. 그냥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