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다시 이어진다. 몸이 편치 못하다는 것. 내 몸이 아픈 것은 싫다. 당연히 싫다. 하지만, 더 큰 그림에서는?
몸이 아닌 사회를 생각해본다. 사회가 아프다는 것, 혼란스럽다는 것. 가장 극단적 경우가 바로 전쟁 아니던가. 전쟁이 없었더라면? 그 혼란 속 모든 것 다 뒤죽박죽이었기에, 다리 밑에서 또 굴속에서 지내던 그 어린이에게도 '위로 오를 수 있는' 틈이 생겼던 것이고,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게 된 것도 그런 '가능성의 틈바귀' 덕분 아니었던가. 내 그런 혼란의 와중이 아니라 지금처럼 꽉 막힌 사회에서 제로 점에서 출발하여 자라나는 세대였더라면? 그런 면에서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온두라스 어린이 엔리끄 이야기가 아니게 들린다. 어디를 둘러봐도 가능성이 없는 사회. 가진 자들의 것은 그들 것일 뿐이고, 빈곤은 그 빈곤층에 내린 업보일 뿐인 사회.
이제 다시 몸으로 돌아온다. 아까 본 법률스님의 청춘콘서트 장면이 생각난다. 제 직장도 좋고 제 능력에도 자신 있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제 불편한 다리를 보고 돌아서곤 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요. 스님의 답.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라. 그럼 다리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여자들에 대한 기대가 깨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누구는 직장 누구는 외모, 누구에게나 그런 실망은 있는 법. 당신에겐 그게 다리요. 다리문제에 집착하며 세상을 보는 것 그 마음부터 다스려야합니다. 자 이제 나에게. '몸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 그것이 내 이 칩거생활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인가? 거기에다만 내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번에는 내 남들에게 하던 충고를 나에게 돌려본다. 노력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아 괴로워하던 그들에게 내 하던 말. 꼭 위만 보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라. 지금 네 위치에 설 수만 있다면 꿈꾸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눈을 의식할 수 있는가? 저기 저 멀리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네 친구의 눈을.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한 줌을 더 얻으려고 괴로워하며 고민을 확대재생산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엘리트들에게 다가오는 함정이라고. 지금 내 주위를 둘러본다. 집사람. 이 사람 이게 무슨 죄인가. 남편 잘못 만나 이 시골에서 지내야하는 것. 아니 여자로서 생각한다. 어쩌다 여자로 태어나 이 남성위주의 세상에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지.
정당화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그것이 첫걸음이다. 지금 저 밖에선 뚝디 뚝틀이 정신없이 좋아한다. 주인마님이 같이 놀아준다는 것, 그것보다 세상에 더 즐거운 일이 있던가? 지금 나?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뭐 우울하다고?
다시 '엔리케의 여행' 그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