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Irène Némirovsky의 'Suite Française'

뚝틀이 2011. 12. 16. 23:11

그냥 한 번 상상해본다. 만약 휴전선이 터지고 서울이 점령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면? 내 무엇을 챙겨 어디로 떠날 것인가. 때는 1940년 파리는 폭격을 당하기 시작하고 이제 곧 독일군에게 점령될 운명. 사람들은 떠나야한다.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하지만,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단 말인가.

 

기차는 끊어지고 주유소는 텅 비었고 길이란 길은 '마치 고기그물에 걸린 듯' 수레와 차로 완전 범벅. 하인들까지 거느린 부자의 피난길, 손수레 유모차에 의지한 힘없는 자들의 피난길. '고매한 인품'들과 '짐승'들의 피난길. 먹을 것 다 떨어지고 탄약마저 떨어진 프랑스 병사들. 휩쓸고 들어오는 독일군 앞 무력한 인간 군상들, 맑은 하늘을 뒤덮는 전투기들, 쏟아지는 포탄들, 불길 속 마을. 그냥 ‘슬픔 그 자체’일 뿐인 ‘움직임 또 움직임.’ 부상병과 산골소녀의 싹트는 사랑. ‘인간 모습’ 스냅 샷. 앵글을 바꿔가며 비춰주는 작가의 처절할 정도로 정밀한 낱말 선택, 그 생생한 묘사, 다큐멘터리. 바로 이런 것이 문학작품의 요체 아니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연기로 사라진 엄마. 엄마의 유품,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한 노트. 그 속에 들어있을 슬픈 사연을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모셔두기만 했던 50년. '프랑스 기록보관소'에 기증하려다, 그래도 한 번은 읽어야할 것 같아 펼쳐본 엄마의 노트. 그것은 일기가 아니었다. 5부작 소설 'Suite Française' 중 첫 두 편 'Tempête en juin'과 'Dolce' (세 번째 편 Captivité는 스케치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다. 딸 Denise는 엄마 Irène의 이 원고를 정리하여 출판하게 되는데.... 전쟁의 와중에서 종이를 아끼려 작은 글씨로 채운 140페이지의 노트는 사실 516페이지 분량의 책이었고.... 이 책은 바로 그 작품의 영어번역판이다.

 

'Storm in June'

재산가 집안 Péricand. 유산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지만, 피난길 포격 속 와중에 당나귀 마차에 올라 흔들리다 비로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늙은 시아버지를 ‘잊었음’을 깨닫는 며느리. 무력감을 떨쳐버리려 '위선'의 세계를 떠나 군 트럭에 올라 전장으로 향했다가 사라지는 사춘기 소년, 둘째. 타지에서 낯선 공증인에게 남겨지는 뻬리깡 노인의 유언, 자선단체로 들어가는 거금 또 城. 목적지 Nîmes에 들어서자 쏟아지는 비보. 노인의 죽음, 둘째의 죽음(나중에 착오였음이 밝혀지지만), 또 목사인 큰 아들조차 자기가 돌보던 고아들에 무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

 

'평범한' 은행원 Maurice Michaud와 그 부인. Tours로의 철수 지시, 하지만 막상 차 자리를 약속해주었던 상관은 마지막 순간 자기 애인을 태우고 사라지고. 직장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 걷고 또 걷는 피난길에 나서는 이 부부. 걷는 것보다 더 빠를 것도 없는 자동차에서 뿜어내는 매연 속 몇날며칠을 통해 작가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비애를 눈물겹도록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결국은 더 어쩔 수 없어 포기하고 다시 파리로. '인품'이 무엇인지 진정한 부부사랑이란 무엇인지 그 모델로 설정된 이 은행원에게 주어지는 작가의 선물,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과의 다시 만남.

 

또 다른 평행선들.

‘품위’의 화신 Charles Langelet. 당황해 우왕좌왕하는 ‘속세 것들’을 경멸하지만, 자신의 차에 연료가 떨어지자, 야비한 방법으로 젊은 부부를 속여 그들의 휘발유를 훔쳐 도망가는 그. Loire까지 도망갔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와 기분 좋은 만남을 향하다 엉뚱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그.

작가 Gabriel Corte와 그의 애인의 피난길. 온갖 '불확실' 속에서도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은 자신을 국보급 존재로 여기는 자만과 원고를 잃지 않으려는 집념, 또 역설적으로, 현실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허영의 극치.

어디 이들뿐이랴. 호텔마다 넘치는 사람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큰소리치는 사람들....

 

너무 멜로드라마틱하다고 할까 아니면 너무 교훈적이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하긴 여기 이 이야기는 작가의 '다듬는 손길'을 거치기 전 원고일 뿐 아니던가. 책 읽는 중간 중간 이 생각이 날 때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가스실에 넣은 나치독일에 대한 '미움'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끊임없이 불끈거리며 그저 막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은 마음이 되곤 한다.

 

追) 2부 ‘Sweet(Dolce)’를 몇 페이지 읽어나다가 갑자기 늘어진 분위기에 줄거리를 미리 찾아본다. 점령 군인과 프랑스 여인간의 사랑 이야기란다. 의심 불륜 질투 복수 이런 것이 주 내용이고. 책을 덮는다. 내 이런 종류 이야기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혐오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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