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정리하고 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정리하고 있다. 파도와 격랑, 내 삶은 그 연속이었고, 내 살아온 세상 그 속이었다. 지금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내 놓은 나를 보고 있다. 파도가 부딪치는 바위에 걸터앉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백사장을 거닐며 소리와 바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햇볕 따스한 베란다에 앉아 물위에 얹혀 반짝이는 햇빛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내 살아오며 원한 것들 중 이루어낸 것 과연 얼마나 될까. 정리하면 이랬다. 많이 생각하고 간절히 공들인 것일수록 결과는 그만큼 더 초라했다. 확신에 반비례하듯 그 결과는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 나를 건져주고 지켜준 것은 우연히 다가온 몇 가지 행운들뿐이었다. 애초에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고 기대도 않았던 몇 가지 부스러기들 그것들뿐이었다.
며칠 전 근처 섬들 한 바퀴 돌 때 그 갈매기들. 사람들이 던져주는 부스러기 얻으려 선회하던 갈매기들. 행운이란 이런 새우깡과 마찬가지 아닐까. 기회와 운과 타이밍.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새우깡만으로 살아가는 갈매기는 없다. 그 수많은 경쟁자들을 골고루 먹여줄만한 새우깡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그런 세상이 있을 수도 없고. 하지만, 반대로, 또 하나도 분명하다. 새우깡을 잽싸게 채어가는 갈매기들. 랜덤 프로세스는 아니었다. 거기에도 재주꾼은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그 녀석이 그 녀석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하나하나 다 달랐다. 이름을 붙여줄 마음이 생길 정도로 몸과 머리의 색이 달랐고 생긴 모습도 달라 구별이 가능했다. 그 중에도 프로가 있었다. 대부분은 그저 들러리 아마추어들이었고. 행운을 즐기는 프로와 아무리 애써도 행운과는 거리가 먼 그 무리들. 어디 비단 할리우드 영화에서 뿐이랴.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가진 자들과 가진 것이라곤 희망뿐인 수많은 군상들, 그것이 바로 세상모습 아니던가. 거기엔 이론과 철학 또 무슨 억울함의 변도 있을 수 없다. 그저 현실과 진실이 있을 뿐이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 방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눈에 들어오는 빗자루. 헝클어지고 색 바랜 그 솔 모습에서 내 머리가 연상되던 것은 잠깐, 이내 내 삶이 바로 이런 빗자루 아니었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옳지 못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폭발하여 결국은 자신이 다치곤하는 존재. 하지만, 귀하고 아까운 것 근처에는 아예 놓일 수 없는 존재. 그런 것을 접할 수 있다면, 그것들이 용도가 다해 폐기 판정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런 일이 가능한 그런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귀한 것을 가까이 했었다고 믿고 싶은 그런 존재. 새우깡 맛본 적이 있는 갈매기. 이 세상엔 옳고 그름 그런 것 없고 선택받느냐 버림받느냐 그것만이 있다는 것을 수명이 다한 후에야 깨닫게 된 빗자루 그 빗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