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비오는 날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짓기는 쉬는 날. 모처럼의 기회다 싶어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선다. 하지만, 마음이 꺼림칙하다. 웬일인지 전혀 흥이 나지 않는 행차.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그냥 무기력한 날. 무엇인가 해보려 하지만, 전혀 흥이 나지 않는 그런 날. 우선 반디지치 동산 쪽으로. 사실 작년보다 한 열흘 일찍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이게 웬일, 이미 끝물이다. 금년엔 다른 꽃들은 일반적으로 열흘에서 보름 정도 늦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무슨 일. 크로스체크. 작년 반디지치 때 한창이던 애기풀이랑 은방울꽃은 아직 꽃망울 상태고, 역시 한창이던 뻐꾹채도 선씀바귀도 겨우 몇 송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위로 아래로 오르내리다 제풀에 지쳐 다시 집으로. 혹시 뭐 있나 하고 연론에 들려보니 졸방제비들이 제법 있다. 의외의 소득?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평소 같으면 눈이 번쩍 뜨일 일. 하지만, 이미 맥이 쭉 빠진 상태라 렌즈 갈고 어쩌고 할 의욕도 사라지고 그저 24-70만으로 마지못해 일하듯.... 시간 탓. (나 죽은 다음엔 어떻게 살 거지?) 사소한 일에도 마치 사춘기 아동처럼 이렇게 행동에 반감이 서리는 것은 그 동안 쌓인 긴장이 너무 커서이리라. 어쨌든 의무이행 후 소야리 으름덩굴 쪽으로. 그제 봤을 때는 아직 한참 기다려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암 수 몇 개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평소 같으면 마크로 접사 후 줌렌즈일 텐데, 그냥 줌렌즈 들이밀기.(물론 그렇다고, 대충 하는 것은 아니다. 땀 뻘뻘 흘려가며 빛 각도에 배경까지 고르느라 어려운 자세 참아가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흥'이 나기는커녕 '분노'만 치솟아 오르는 것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판단에 이번엔 차를 금붓꽃 계곡 쪽으로. 찾는 꽃은 보이지 않고 철 지난 돌단풍뿐. 그래도 배경은 좋아, 역시 또 평소 같으면 '작품' 한 번 만들어볼 생각에 의욕이 흘러넘치겠지만, 아직 ‘나에 대한 분노’로 제 상태가 아니다. 불어난 물과 잡목에 걸려 계곡 따라 바위 사이로 움직여가기도 쉽지 않아. 다시 저 만큼 윗쪽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며 목적의 꽃을 찾아보지만 덩쿨꽃마리는 그냥 패스. 관둬라 관둬. 겨우 한 구석에 숨어있는 콩제비 찾아낸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 여기에서도 렌즈 갈아 끼울 생각이니 의욕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마음상태에서 바닥에 딩굴어보지만, 카메라도 눈치 챘는지 사보타지. 노출시간 휠이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수직그립 빼고 배터리 다른 것 넣고 한참 만지작거리니 그때야 마지못해 반응. (불쌍한 카메라. 주인 잘못 만나 어제는 길바닥 저만치 내던져져 탕탕 구르는 곤욕에, 집에서 또 한 번 테이블에서 쾅 떨어지는 수모의 날을 보내고... 하긴 이런 추락사고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렌즈 들여다보며 매뉴얼로 초점 맞추며 숨 고르는 것도 이제는 힘겨워 더 못할 짓이다. ‘사진은 무슨 얼어 죽을 사진’하며 길가 엉뚱한 제비꽃에나 카메라 겨누다 허리 펴고 일어서는데, 어떤 양반 차타고 창을 내리며 말을 건넨다. 아하. 이 양반에게 물어보면 되겠구나. 금붓꽃이 어디 있죠. 안 보이네요. 차 씽씽 달리는 길에서 몇 마디 나누다 위험하다며 저 앞으로 가 차를 돌려 내 쪽으로 다시 온다. 저 산 안쪽에 있는 무슨 폭포 이야기를 한다. 번지 수 잘못 짚었다 생각되지만, 그냥 인사치레로 이따가 그쪽으로 한 번 가보겠다 인사치레로 대답하자, 혼자 찾아갈 곳이 아니니, 자기가 안내를 해주겠단다. 나보다 그저 한 두살 많을까. 외로움이 철철 넘친다. 혹시 또 아나, 폭포라면 매력적인 꽃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를 따라 나선다. 사륜구동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산길로 들어서 한참 가니 이분의 집이 나온다. 커다란, 아주 커다란 비닐하우스엔 재배용 용담이 가득하고, 연못을 지나 좀 더 올라가니 폭포가 떨어진다. 마누라는 절에 가고 혼자란다. 이 폭포를 자랑하고 싶었던 거로구나. 올라가보니, 계곡의 물을 호스로 끌어 이렇게 흘러내리게 해 놓은 것. 그렇다고 우리집 진짜 폭포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는 일이고,... 적당한 선에서 분위기를 맞춰준다. 술 한 잔 들겠냐. 역시... 하긴, 자그마한 백구 한 마리도 낯선 나를 경계하기는커녕 내 만져주는 손길을 그렇게 반길 수가 없다. 작은 공원을 만들려던 모양인지 공사하다 중단한 흔적이 사방에 어지럽다. 한 바퀴 돌고 내려오니, 음료수 권하며 밑도 끝도 없이 젊었을 때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한 탓으로 여기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여기 땅이 몇 십만 평인데, 일부라도 팔리면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에 도서관을 하나 지어줄 예정이란다. 대리석 건물로 견적까지 뽑았는데 한 15억 원 정도의 예산이란다. 훌륭한 생각이라고 맞장구쳐주며 시간을 보내다, 이제 더 이상 안 되겠다싶어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아니나 다를까. 냉기류. 더구나 이젠 카메라까지 컴퓨터랑 통신 거부다. 상윤에게 전화도 해보고 ‘오만가지’ 조작 후에 메모리카드 겨우 구해냈지만, 모니터에 올라오는 사진들 보면서 경악. 초점 맞은 사진이 거의 없다. 아니 하나도 없다. 오늘 찍은 졸방제비꽃, 콩제비꽃, 돌단풍, 뻐꾹채, 선씀바귀, 반디지치, 둥굴레, 으름덩굴, 토종민들레, 그리고 또 종지나물...... 다~ 쓰레기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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