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틈만 나면 청계천 들려 Somerset Maugham의 책들을 무조건 긁어모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The Razor's Edge’, ‘Of Human Bondage’, ‘The Razor's Edge’, ‘The Moon and Sixpence’, ‘The Summing Up’. 지금은 다 지난 이야기, 옛날이야기. 그 퀴퀴한 냄새나던 펭귄 북들 다 언제 어디로 사라져갔는지 기억도 없다. 아득한 추억 그때. 도대체 그때 왜 이렇게 이 사람에게 빠졌었을까. 어쩌면 교복 갓 벗은 당시 나에게 ‘모범 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눈 그게 그렇게 강한 매력 아니었을까.
어느 책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이런 말도 있었다. “포커 판에서 돈을 따려는 욕심은 마치 영화 다 보고서도 돈 안내고 나오려는 심보와 같다. 즐겼으면 그 즐긴 만큼 지불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 후 라스베이거스에 몇 번 갈 일이 있었지만 카지노장엔 들어가지도 않았었다. ‘딸 수도 있는 곳에서도 잃고’ 나오는 내 모습이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몇 달 머물던 당시, 6시만 되면 완전 공동화되던 그곳 도심, 거기에 열린 곳이라곤 카지노뿐, 식사 후 느긋한 마음에 장난삼아 눌러댄 포커머신에서 쏟아져 나오는 칩, 이번엔 빅 휠에 올려놓았더니 47배, 세상에! 하지만, 결국 결과적으론 비싼 맥주 마시고 나온 그런 내 꼴. 확률의 승리.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던 그 애들레이드 때부터 참 생각이 많아졌다. 그 당시 난 패배자였다. 완전 패배자. 무슨 도전을 하다 쓰러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스러지고 사라지는 패배자. 그때 떠오른 내 ‘복권철학’, “복권은 사야한다. 잃을 확률 물론 크지만 그래도 큰 수확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복권을 사지 않으면 얻을 확률 수학적으로도 제로다.” 그 얼마 후 중국에서 강의 때 이 말을 했다 엄중항의를 받았었다. 그 상징성 이해 못할 학생이 어디 있을까 이야기해도, 그쪽 담당자는 단호했다. 복권이라는 단어 그것이 문제라고. 그래 좀 점잖게 말을 바꾸지. 실감은 덜 나겠지만. “도전하는 자에게만 운명의 신이 웃어준다.”고.
그랬다. 그때까지 난 너무 나 자신을 가둬놓았었다. ‘내 분야’와 ‘나와는 상관없는 분야’,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의 칼 같은 구분. ‘생각’이란 것이 무엇인가. ‘나 자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의 특질은 시간의 축 위에 자신을 놓고 보는 것 아니던가. ‘현재’라는 것은 오직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로 향하는 중 하나의 스냅 샷일 뿐. 그렇다 패배자의 느낌은 ‘변화 없음’의 연장선상에 보이는 나의 모습 거기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생각의 범위를 넓혔다. 생각의 지평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고 우리, 오늘이 아니고 내일이 중요하다고.
‘관할 규모’가 커질수록 그만큼 ‘고민’이 더 많아지고 스트레스도 더 쌓인다. 대통령이 된 촌부라고나 할까. 돌이켜 생각해본다. 나의 지금 이 회한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내 본령’에 대한 후회 그런 것은 거의 없다. 아니 그냥 없다. 모든 것은 내 ‘복권’으로부터 시작했고, 그 ‘복권’이 어느 새 ‘포커 게임’의 성질을 띠기 시작했다. 불행은 그동안 서머세트 몸의 그 말을 잊고 있었던 것. 한 편의 영화를 보고나온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영화’를 만들려 뛰어다녔던 내 자신의 그 ‘재미에 대한 대가 지불’ 그것을 거부하는 마음, 내 모든 회한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