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사이의 애틋한 사랑이 문제로 바뀐다면? 그럴 리 없다. 철저하게 검토해 ‘위원회’가 배우자를 정해주는 여기 이 사회에서는. 출산의 고통? 양육문제? 취직문제? 원, 별 걱정을. 위원회에 신청해 ‘Birthmother’에게서 생산된 ‘newchildren’ 중 ‘release’과정을 거치며 검증된 베이비를 분양받으면 된다. 나이별 ‘groupmate’에 해당하는 모양의 옷 또 자전거를 받으며 엄격한 규율 훈련을 받고, 8살에 자원봉사를 시작하고, 12살이 되면 위원회로부터 직업을 지정받는 이 사회, 건강치 못하거나 사회적응능력에 문제가 있을 것 같으면 ‘release’ 되는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있겠나. 정욕? 격렬한 감정? 그런 것 다 ‘알약’으로 해결된다. 상대적 열등감? 그런 걱정 역시 원인 무효다. 모든 집은 똑같이 생겼고, 입는 옷 역시 똑같고, 상징적 의미를 줄 수 있는 언덕 그런 것조차 없는 이 ‘sameness’사회에선 모든 것이 평등하고 모든 것이 평평하다.
위원회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면? ‘The Receiver of Memories’를 찾아가면 된다. 오랜 세월 걸쳐온 고통의 기억과 모든 지식이란 짐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다. 오래 전 이 사회가 그에게 맡기기로 한 짐이다. 지혜란 고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오직 이 한 사람에게만 지혜를 구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아이들이 위원회가 정해준 직업 준비과정으로 들어갈 때, 12살 소년 Jonas만을 따로 떼어놓은 것은, 바로 이 Receiver 자리의 후계자 그 자리를 맡기기 위해서이다. 두 사람이 전달전수과정에 들어갔으니 이제 그 역할에 따라 소년은 Receiver 지금의 전수자 는 당연히 전달자의 위치가 된다. The Giver.
전수받는 첫 기억은 흰 눈과 따사한 햇살, 또 빨간 머리 초록 숲 그 느낌. 날씨까지 완벽하게 조절해가며 사람들의 감각 기능까지 박탈된 이 사회에서 자란 Jonas에겐 충격적 느낌. 이어 얼마 후, 배고픔의 그 고통과 전장에서의 참혹상. 매일 각 가정에 식사가 배달되고 잔반이 수거되고 갈등의 원인이 될 요소는 제때에 release되는 이 사회에선 생각조차 해보지도 못했던 느낌이다. 한 해가 거의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전수받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모습: 가족, 사랑. 배급받은 아이들을 양육하다가 일정 나이가 되면 ‘House of the Old’에서 ‘존경 받으며’ 살아가고 그러다 또 다른 일정 나이에 이르면 미사여구 성대한 절차를 거쳐 ‘release’되는 여기, feeling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자라온 Jonas에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개념 또 'love'의 그 느낌은 충격 그 자체다.
낮에는 기억을 전수받는 과정을 밟고 집에 돌아와서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newchild를 돌보고 있던 Jonas, 이 newchild에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이제 갓 태어난 쌍둥이 중 한 명을 ‘release'해야 한다는 아빠의 말을 듣고 Elsewhere 그 어딘가 이웃나라로 보내주는 무슨 축복의 의식이겠지 생각하고 들어갔다가 결국 ‘release'의 의미를 알게 되고야 마는 그. 작가가 전에 깔아놓았던 복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완전사회‘ 여기서 feeling이라는 것을 가진 단 두 사람 The Giver와 The Receiver, 이들은 드디어.....,
원래 아동도서로 분류된 이 책 구입을 망설였었다. 하지만, 캐나다와 미국 여러 주에서 이 책이 금서목록에 들어갔다는 검색 결과를 보고 다시 돌아와 망설임 없이 클릭. 언제나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줄거리뿐이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작가의 숨결. The Road 읽던 그때처럼 숨이 막힌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그 상징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고통이라는 것 다. 내 자유? 얼마정도 포기할 수 있다. 골치 아픈 이야기로 날 귀찮게 하지 말고, 그저 너희가 알아서 하면 안 되겠니? 미사여구 난무하는 오늘의 우리사회, 그 뒤에서 음흉한 미소 짓는 그 존재들. 만약 스필버그가 이것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실상은 dystopia일 뿐인 이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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