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는 Cogitamus. Six lettres sur les humanités scientifiques.
Sciences Po 대학의 교수인 Bruno Latour가 과학과 과학이외의 분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신의 강의를 독일 여학생에게 보내는 여섯 통의 편지형식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원제목의 ‘Cogitamus’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의 앞부분을 ‘우리는 생각한다.’로 치환한 단어. 과학과 사회 또 정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며, 과학적 인문학 Humanité scientifique이란 새로운 학문분야를 열고자 하는 자신에 동의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책의 의도.
고매한 순수과학자로 묘사되는 아르키메데스가 사실은 그가 고안한 무기로 고향 시라쿠사를 로마의 침공으로부터 구해낸 연후에야 왕으로부터 과학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에서 보듯이, 페미니스트 마거릿 생어가 화학자와 자본가의 도움을 받아 개발한 피임약으로 원치 않는 임신에 발목 잡힌 수많은 여성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에서 보듯이, 또 GMO 줄기세포 코펜하겐 기후협약 회의에서 일어나는 논란에서 보듯이,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행위, 기술의 사용, 과학을 통한 경유, 정치의 침입을 구분하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새로운 단계’의 시대가 도달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 과학적 방법론을 정확히 적용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과학이 된다고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 아니라 사물에 있다는 것, 실험실이야말로 과학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사물의 존재를 함께 탄생시키고, 또 실제로 인간과 자연의 실체적 변형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하며, 그는 과학과 정치 또는 자연과 사회라는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수많은 반박과 재반박 또 무수한 우회와 번역 작용을 통해 형성되어가는 과학의 성격상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과학이 결코 완전한 진리는 아니라며 그는 말한다. “Cogito에서는 아무것도 연역되지 않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말이죠. 하지만 Cogitamus에서는 모든 것이 연역될 수 있습니다.”식의 현란한 현학적인 서술을 곁들이며 그가 이끌어내고자 하는 결론은 대충 이렇다. 과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자율적이라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과학에는 그 결과물이 인간생활 곳곳에 깊숙이 섞여들면서 사회의 일부가 되는 성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과학이 ‘실험실’이라는 곳에서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전문용어와 폐쇄적 성격의 과정을 통해서야 ‘Cogito 성격의 증명’이 가능했지만, 인터넷이라는 지식공유 및 검증이 가능한 디지털 플랫폼이 확장되어가는 이제 ‘Cogitamus’의 시대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곳곳에 남겨놓은 라틴어 또 불어 단어 그 개념의 재조명을 접하며 ‘지식’이 많이 다져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너무 심한 견강부회 아닌가 하는 거부감이 강하게 일어난 것 또한 사실이다. 저자 자신이 인용한 갈릴레이의 말, ‘내 증명 하나만으로도 열 명의 아리스토텔레스와 열 명의 데모스테네스를 반박할 수 있다.’처럼 과학적 진실이 다수결로 가려질 수야 없는 법 아닌가. 줄기세포연구 GMO 분쟁? 좋다. 하지만, 여기의 논란은 응용의 합당성에 관한 것이고 그 이전의 유전자 원리탐구 거기엔 다수결 그런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과학의 응용이 내포하는 위험성 또는 어떤 분야에 투입되는 연구자금의 정당성 그런 관점에서의 합의도출 그것을 염두에 둔 이론, 이 책의 내용은 거기에 국한된다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이론전개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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