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육체도 원자들이 일시적으로 결합된 구조일 뿐, 언젠가는 모두 분해될 운명이지요.”
“영혼도 사멸하지요. 사후심판은 없습니다. 신성한 힘이 우리를 창조한 것도 아니고, 사후세계 운운은 미신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공포 속에 떨며 살게 하는 설교자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은 우리의 행동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쾌락이야 말로 삶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걱정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말을 겁 없이 뱉어내는 사람이 있었을까? 고대 희랍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라고?
인간 至高의 幸福을 아포니아ἀπονία와 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α로 선언한 그 쾌락주의의 주창자 그리스人 그 에피쿠로스Ἐπίκουρος?
(Aponia는 육체적인 고통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ataraxia는 마음이 혼란하거나 동요함이 없는 평온한 상태.)
딩~동~댕~! 하고 싶지만, 미안하게도 에피쿠로스(BC341–BC270) 그 사람 본인의 글은 아니고,
BC50년경, 로마人 루크레티우스Lucretius가 그에게 바친 오마주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에 나오는 내용이란다.
궁금해서 찾아본다. ‘Of The Nature of Things’ (http://www.gutenberg.org/files/785/785-h/785-h.htm)
산문이 아니라 詩다. 번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원래는 율격이 엄격하고도 아름답게 살아있는 라틴어의 詩란다.
그 오래전 이 책이, 시간이 지나면 좀 쓸어 사라지는 양피지에 쓰였었을 이 책이, ‘異端’ 에피쿠로스派의 ‘위험한 생각’으로 가득 찬 이 책이,
어떻게 그 기나긴 기독교세월을 살아남았지?
더구나 이 단 한 권의 책을 필사로 건진 포조(원음에 가깝게는 뽀죠 브라춀리니 Poggio Bracciolini)라는 인물이 로마 교황을 여섯 분이나 모셨던 비서(그냥 비서실 소속이 아니라 '비서')였다면 이건 어떻게 된 일이지?
이야기는 이렇게 된다. 뽀죠 브라춀리니가 교황 요한 23세를 모시고 공의회 참석차 독일의 콘스탄츠konstanz에 갔을 때,
인근 수도원에서 ‘주인 잃은’ 그의 눈에 들어온 빛바랜 필사본 하나.
“아이네아스의 후손들의 어머니시여… 생명을 주는 베누스시여……
제가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친애하는 멤미우스 집안의 자손에게 엮어보이고자……
……
나는 그대를 위해 하늘과 신들의 최고의 이치에 대하여 논하고 사물들의 기원을 밝히려 하노라.
자연은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키우고, 사멸하도록 다시 그것으로 헤쳐 보냈으니,
이것들은 재료, 사물이 될 생산의 몸, 씨앗, 첫 번째 알갱이. 모든 것이 이로부터 나왔노라.
인간의 삶이 무거운 종교에 눌려 있을 때, 처음으로 한 희랍인이 필멸의 눈을 들어 감히 그에 맞섰다.
그는 자연의 문에 굳게 채워진 빗장을 부숴버렸고, 우주의 끝을 벗어난 저 머나먼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우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고 무엇이 생겨날 수 없는지, 그것들은 어떤 이치에 의해 그런지를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종교는 우리의 발 아래로 내던져졌고 승리는 우리를 하늘과 대등한 존재로 만들었다.”
(‘Of The Nature of Things’ http://www.gutenberg.org/files/785/785-h/785-h.htm에 다시 들어가 본다. 정말 방대한 규모의 詩集이다.
다루는 주제도 가볍지 않다. 存在, 無, 물질과 공간, 원자와 운동, 시간과 공간 관점에서의 우주의 무한성, 규칙성과 재현성,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心性, 영혼, 性과 生産, 질병…….)
9세기 이후 프랑스와 독일 수도원 두세 곳에서 떠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어느덧 다 사라져버렸다고 생각되던 책이 500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다.
28년간 버클리의 교수로 있다 하버드로 옮긴 인문학 교수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나와 숫자 하나만 다른 생년월일)
그의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 이걸 어떻게 책으로 낼 수는 없을까?
에피쿠로스학파의 소개? 그건 좀 진부하고…….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에 주석을 달아서? 글쎄, 그런 것 읽을 사람 얼마나 되겠나.
차라리 뽀죠 브라춀리니 Poggio Bracciolini란 인물에 초점을 맞춰? 글쎄, ……. 생각 끝에 그가 정한 책 제목,
‘The Swerve: How the World Became Modern.’
우리 출판업자의 생각, 이런 수수께끼 같은 제목으로야…. 그래서 ‘1417년, 근대의 탄생 -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이번엔 예외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책 제목을 ‘책 사냥꾼 이야기’로 정한 것은 참 탁월한 선택이다.
사실 이 책은 끝부분에 가서야 루크레티우스 글이 미친 영향 쪽을 다루지, 그 때가지는 포조의 눈과 귀 또 경험을 비는 형태로, 암흑기 중세(로마의 몰락 후, 그 건축물과 조각들이 뜯겨나가 가정집 건축자재로 쓰이며 소실되어가는 비극적 현장들, 15세기 초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과 기근의 참상)의 모습, 로마제국의 위세가 꺾인 후 교황이라는 자리(콘스탄츠 공회도 자기가 정통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셋이나 되는 난국에 어떤 타협의 실마리라도 찾으려...), 교황청의 ‘통치자금’을 마려 생각해낸 ‘면죄부’라는 아이디어(미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매한 신도들에게 지옥에서의 고통으로 엄포를 놓고, 일종의 성지순례로 교황청을 찾아 성금을 바치면 지옥고통을 면할 수 있다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은 알프스 산맥 북쪽의 신도들에겐 여비에 해당하는 금액을 더 얹어 바치면 같은 효과가 있는 것으로 하고), 그것도 모자라 각종 이해관계 증명서를 떼어주고 재판에 관여하게 되어 ‘떡고물’이 떨어지게 되어 있는 ‘성직자 자리’의 매매(교황 요한 23세가 평복으로 갈아입고 야반도주하게 된 것도 그렇게 치부했던 죄로 처형당할까봐...) 등 이야기에 이어, 그런 ‘자리’를 사들인 성직자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性적 내용의 유머집에 나오는 성직자와 관련된 각종 음담패설은...), 기득권자 그들의 횡포는 어땠는지(성경에 의하면 구원에는 ‘중간매개자’가 필요 없다고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얀 후스Jan Hus는 이단자로 몰려 화형당하고, 그 후로도 100년이 지난 1517년이 되어서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부패와 타락의 온상 그 현장에서 일하는 ‘지식인’들 사이의 권모술수(또 가장 원초적인 육탄전)의 모습은 어떤지, 수도원이란 곳이 어떤 곳이었으며(용도 폐기된 귀족자제의 ‘보관소’ 또 범인들의 ‘도피 장소’) 실제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상상도 못할 정도의 엄한 체벌, 하는 일은 영지관리 세금징수), 그런 상황에서도 라틴어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는 인문주의자들의 모습은 어땠는지, 고대문헌이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재활용 차원’에서 양피지에 쓰인 글자를 긁어내고 그 위에 새로 쓰기도 하고, 또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대개의 경우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소유자의 -대개의 경우는 수도원- 무관심으로 곰팡이에...), 인쇄술이 나오기 전 그때 필사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사냥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수도원을 찾아다니는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외부인에 대한 수도원 측의 적대감, 과도한 금전요구), 왜 베수비우스Vesuvius화산폭발이 문헌보전이란 관점에선 역설적이게도 도움이 되었는지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책의 정리부분에 가서는, 사실 ‘쾌락주의’란 관점보다는 ‘원자론’이라는 개념이 기독교계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 ‘위험선’에서 ‘곡예’를 하던 ‘사상 모험가’ 죠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가 어떻게 희생물이 되는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에피쿠로스주의 또 그 한계에 대한 고려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또 몽테뉴나 셰익스피어 등 후세 작가 글들에는 루크레티우스의 문장들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보티첼리, 갈릴레오, 프로이트, 다윈, 아인슈타인 등으로까지 이야기가 번지는 것은 내 그다지 찬성할 수가 없고.) 또 내 그동안 궁금해 했던 로마와 피렌체의 역학관계에 대한 설명은 덤이었다.
예외적으로, 특별히 언급할 점은 ‘느낌이 살아있는’ 번역. 이런 훌륭한 이혜원이라는 번역가에게는 고마움과 존경까지 느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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