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오 헨리의 ‘20년 후’

뚝틀이 2013. 6. 11. 15:37

습기 가득 머금은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는 거리, 밤 10시 될까 말까 한 시간, 의젓한 걸음걸이로 경관 한명이 순찰을 돌고 있다.

좀 거드름을 피우는 듯 보이지만 그냥 습관일 뿐. 사실 또 거드름피운다 해도 지금 누가 봐주겠는가.

군데군데 작은 가게나 노점식당이 붉을 밝히고 있을 뿐, 회사 사무실들은 문 닫은 지 오래다.

 

철물점 앞 컴컴한 곳에 한 사나이가 불붙지 않은 담배를 물고 서있다. 경관이 발걸음을 늦추며 천천히 다가간다.

       “별 일 아닙니다. 경관님.”

서둘러 안심시키려 듯 그 사나이가 말을 잇는다.

       “전 지금 친구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20년 전의 약속이죠. 의심스럽다면 제 얘기 들어보실래요?

        그땐 여기 바로 이 자리에 Big Joe란 별명의 Brady가 하던 식당이 있었는데.....”

경관이 말을 받는다.

       “5년 전에 헐렸죠.”

 

사나이는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 불에 비치는 창백한 얼굴, 날카로운 눈, 네모진 턱, 눈썹 밑의 작은 상처.

       “꼭 20년 전 오늘 밤, 그때 여기 Brady식당에서 친구 Jimmy랑 저녁을 먹었죠.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친구이자 저랑은 형제 같은 사이였어요. 난 열여덟, 그는 스물.

        전 그때 서부로 떠날 예정이었죠. 한 밑천 잡으려고요. 자긴 안 가겠다고 하더군요. 뉴욕이 좋다고.

        우린 그때 약속했죠. 우리가 어떻게 변해있건 상관없이 20년 뒤 바로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로요.”

경관이 묻는다.

       “20년은 너무 긴 시간 아닌가요? 그 사이에 소식 같은 건 없었나요?”

사나이의 말.

       “물론 처음 얼마동안은 편지가 오갔죠. 그런데 서부라는 곳이 그렇잖아요. 제가 죽기 살기로 돈벌이에 빠져서....

        그렇지만 전 1,000마일을 달려서 오늘 여기에 왔어요. Jimmy도 틀림없이 올 거예요. 정말로 고지식한 친구거든요.”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고급시계를 꺼내 들여다본다. 뚜껑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반짝인다.

       “3분 전이네요. 10시 정각이었어요. 우리가 여기서 작별한 게.”

       “그래, 서부에서는 재미 좀 봤나요?”

       “물론이죠. 뉴욕과 달리 서부란 곳은.... 지미도 내 절반쯤은 성공했을 거예요. 좀 느린 편이거든요. 성품이 너무 착한 거 있죠.”

경관은 곤봉을 빙글빙글 돌리며 몇 걸음을 옮긴다.

       “이제 가봐야겠네요. 그런데, 친구가 약속시간을 못 지키면 그냥 떠날 겁니까?”

       “그럴 리가요. 내 친구는 반드시 와요. 적어도 30분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어요.”

 

경관은 떠나고, 차가운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옷깃을 여미고 호주머니에 손을 찌른 사람들이 발걸음을 서두른다.

철물점 앞 사나이는 여전히 계속 담배를 피워 물며 친구를 기다린다.

20분쯤 지났을까? 귀밑까지 외투 깃을 세운 키 큰 사나이가 길 저쪽에 나타나더니 곧장 사나이에게로 다가온다.

       “Bob, 맞아?”

       “Jimmy야?”

나타난 사나이가 기다리던 사나이 두 팔을 잡는다.

       “틀림없는 Bob로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다시 만날 줄 알았지. 그래 서부에선 지내기 어땠지?”

       “거기야 대단하지. 그런데 너 꽤 많이 변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키가 커졌지?”

       “어, 스무 살이 넘어서도 크더라고.”

       “그래? 뉴욕에선 잘 지내고 있었겠지?”

       “뭐, 그럭저럭. 자, Bob, 가자고. 내가 잘 아는 집이 있거든.”

 

둘은 팔짱을 끼고 걷는다.

자기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길게 늘어놓던 서부의 사나이가 길모퉁이 약국 환한 불 밑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푼다.

       “넌 Jimmy가 아냐.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매부리코가 갈아 앉지는 않지!”

키 큰 사나이가 말한다.

       “하지만, 20년이란 세월이 지나면 착한 사람이 악당이 될 수는 있지.”

그 말과 함께 그가 내미는 쪽지에 쓰인 글.

       “Bob, 난 약속장소에 갔었어.

        자네가 성냥을 켜는 순간 난 시카고에서 지명수배 중인 얼굴이란 걸 알 수 있었지. 그래도 내 손으로 체포할 수는 없더군.

        그래서 순찰을 마친 후 돌아와 내 동료에게 부탁한 것이라네.

        Jimmy로부터.”

 

재미 삼아.....

-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아무리 어렸을 적에 형제처럼 지낸 친구라도 말이다.

- 담배는 끊어야 한다. 공연히 불붙이다 얼굴을 들키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긴 요건 사실...)

- 약속은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쓸 데 없는’ 약속 안 했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것 아닌가.

- 약속은 지키는 게 아니다. 더구나 20년 전 약속을 뭘.... 순진하긴.

- 약속장소엔 미리 가는 게 아니다. 시간 지나서 왔었더라면 거기 경관이 어슬렁거리는 것 보고 피할 수 있지 않았겠나.

- 약속장소에 본인이 나서는 게 아니다. 영화에도 있잖나, 먼저 꼬마에게 용돈 쥐어주며...

- 약속장소는 붐비는 곳으로 정해야한다. 북새통 시장에서였다면 ‘이제라도’ 튈 수 있지 않았나.

- 경찰 말은 믿으면 안 된다. 불빛에 얼굴을 보고 지명수배자라는 걸 알았다는데, 그건 완전 뻥이다.

               전단지 보고 이미 친구라는 걸 알아봤겠지. 약속장소엔 그저 확인하러 나왔을 뿐이다.

               그러니까 경찰을 친구로 두면 안 된다. 경찰 될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니, 어렸을 적부터 조심하자.

-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미리 ‘20년 후’라는 소설을 한 번만 읽어뒀어도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 자기 이름에 충실해야지. 이름이 Bob이면 그냥 밥이나 먹으면 됐지, 뭔 얼어 죽을 다이아몬드는... 그건 김중배나...

- 소설에 등장하려면 작가를 잘 선택해야한다.

               딴 소설에 나왔더라면 그 눈썹 밑에 상처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멋진 활약상이라도 보여줬을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