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틀이식 책 요약

쟝 폴 사르트르의 ‘구토’

뚝틀이 2015. 11. 21. 03:07

Jean-Paul Sartre(1905-1980), Nausea, La Nausée 1938

 

 

옹뜨완느 로깡땅Antoine Roquentin의 일기입니다. (작가 사르트르의 일기라고 생각해도 상관없겠죠?)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1932년 1월부터 시작되네요.

 

30살 정도의 역사학자 로깡땅, 이곳 해변도시 부빌Bouville을 찾아왔습니다.

롤봉Rollebon 후작에 대한 책을 쓰려, 그의 출생지에 온 것입니다.

그는 기차역 옆 단칸방에서 3년째 살고 있습니다.

그가 왜 일기를 쓰는지를 말합니다.

 

   사물을 볼 때 무엇인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꼭 집어낼 수가 없다.

   일기로 하나하나 기록해나가다 보면, 어떤 것이 얼마만큼 변했는지 알 수 있겠지?

 

   얼마 전, 물에 돌을 던지면 노는 아이들 흉내를 내려 돌을 하나 집어 들었을 때,

   참으로 묘한 느낌이 왔었는데, 그것이 돌멩이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내 자신으로부터 왔는지 확실치가 않았다.

   이런 느낌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광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일기를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며칠 후, 그의 일기는 계속됩니다.

 

   주변의 사물 또 사람들에 대한 이 불안한 느낌, 이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다.

   무슨 추상적 변화가 일어났는데, 지각은 조금씩 변해가는 중, 그런 것일까?

   변덕스런 결정으로 갑자기 베트남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던 것,

   그것이 내 이런 마음상태변화의 전조는 아니었을까?

 

   사람들과의 교제도 없이, 친구도 없이, 방에만 누워있는 나의 이 고독한 생활 스타일,

   이것이 나를 변화시킨 것은 아닐까?

   내 내면을 들여다보며 답을 구해보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맥주잔도 잡지 못하겠고, 길에 떨어져 있는 젖은 종이도 집어들 수 없다.

   그때, 그 돌을 잡았을 때를 돌이켜봐도, ‘손에서 구토증’이 느껴졌었다.

 

   관심을 딴 쪽으로 돌려 이런 걱정에서 벗어나려 롤봉 후작에 대한 자료를 들춰보지만 이내 싫증이 난다.

   10년 전,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때는 이 일에 그렇게 매력을 느꼈었는데,

   이젠, 실제인물 롤봉 그가 아니라 내 추측만 쌓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내 자신을 현재에서 떼어, 과거에 가두어놓은 그런 느낌말이다.

   결국, 외부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다시 돌아온다.

 

   해가 떠올라 사물들에 빛을 비추면 그들 모습이 나를 불안케 한다.

   롤봉에 집중하려다 안 돼, 나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는데,

   이 모습이 나의 얼굴인지조차에도 자신이 없다.

 

   난 이 구토증이 나 혼자 있을 때 나타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젠 카페에서도 그렇다.

   이건 나쁘다. 아주 고약하다.

   난 이제 사람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젠 상대의 눈까풀, 머리카락, 뺨, 더러운 피부, 큰 콧구멍만 보일 뿐이다.

 

   머리가 돌기 시작한다. 구토를 하지 않으려 몸을 추스르곤 한다.

   바텐더의 자색 멜빵이 나를 괴롭힌다. 이것이 계속 색깔을 바꾸고 있다.

   그래서 내 좋아하는 재즈 ‘Some of these days’를 틀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큰 시간의 공간’을 때울 수 있을까?

   음이 태어나는듯하더니 이내 사라지곤 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할 뿐 아니라, 아니, 내 스스로가 원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구토증이 사라진다. 멜로디가 실세계에서 시간을 부숴버린 것이다.

   난 음악을 느낄 수 있다.

 

   음악이 끝나고, 뭘 해야 할지 모른다.

   영화를 볼까 하다, 길거리만 돌아다닌다.

   빛이 있는 곳이 싫어서 어두운 거리만을 걷는다.

     ‘블랙홀’

   밤거리 암흑 속의 ‘아무 것도 없음’에 끌리지만, 왜 그런지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편해진다는 것,

   구토증은 밝은 곳에서만 생긴다.

 

   난 구토증을 피하려, 아예 사물을 보지 않으려, 발자크의 시를 읽고, 롤봉의 자료를 찾는다.

 

   오늘 도서관에서 ‘독학맨Self-Taught Man’을 만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도서관 책을 알파벳순으로 읽으면 결국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난 그런 그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통념적 시간정의가 그 의미를 잃었음을 느낀다.

   나는 이제 현재와 미래를 구별할 수가 없다.

 

   난 외로움을 달리기 위해서 그와 대화한다.

   그가 나의 ‘모험심’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는데,

   내 생각에 모험이라는 것은 단지 ‘시간의 꼬리’를 잡으려는 시도일 뿐이다.

   내 과거 모험을 다시 생각해낼 수가 없다.

   난 현재에 버려진 존재다.

 

   프랑스혁명 당시, 권모술수에 능했던 롤봉, 이제 그에 대한 연구를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다.

   난 그가 귀족들에게 쓴 편지들을 그 거짓말들을 즐기곤 했는데,

   불현듯 그 편지들이 나게 쓴 거짓말로 느껴진다.

 

   이제 관심을 여자 쪽으로 돌린다.

   카페에 있는 여자에게 수작을 걸어보지만, 성관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혐오감이 엄습한다.

   개미나 벌레가 그녀 다리에 기어오르는 것 같고 갑자기 토할 것 같다.

 

   옛 연인 애니Anny로부터의 편지가 왔다.

   베트남을 떠난 지 5년, 그 사이 어떤 연락도 없었는데, 파리에 왔다고, 꼭 만나봐야 한다고 하는데,

   대화가 통하지 않았던 옛 생각이 난다.

   뭔가 좀 더 기억해보려 하지만 아무 기억도 나질 않는다.

   만나든지 무시하든지 그건 내 결정이요, 내 책임이라는 생각.

   거기에 현기증이 온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진공일 뿐이다.

 

   과거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없다면 현재에서도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역사학자들은 현재의 사건과 인물들을 의미 없는 과거와 연결시키려 한다.

   레닌Lenin이 러시아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라든지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의 크롬웰Cromwell이라든지 ∙∙∙∙∙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ness’들끼리의 비교.

 

   난 나 자신을 의미 없는 과거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

   초상화 박물관에 걸려있던 나를 향한 수백 개의 눈들을 생각한다.

   죽음이 두려워, 삶에 어떤 의미를 주려던 이들의 눈들을.

   죽음은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것인데 왜 그것으로부터 숨으려 하지?

 

   롤봉에 대한 연구는 이제 그만 두기로 한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결국, 롤봉 또 과거에 대한 탐구는 내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몸부림이었다는 이야기다.

   롤봉이 그가 원래 왔던 ‘아무 것도 아님’으로 돌아가고, 내 연구기억 역시 ‘아무 것도 아님’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내가 그에 대해 썼던 것 그건 다 허구다. 차라리 소설에나 어울린다.

 

   나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든다.

   카페에서 보고 만나는 사람들, 그들은 로봇처럼 행동한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두려워서,

   누구랑 자는지, 무슨 음식을 입에 넣는지∙∙∙∙∙ 계속 거짓말을 늘어놓을 뿐이다.

 

   난 독학맨과 휴머니즘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그는 자기는 사회주의자이고, 따라서 세상 모든 여자와 남자를 사랑한다며,

   모든 이성적인 행동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의 본질?

   그런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데도, 뭘!

   열띤 논쟁에 난 구토증이 심해지고, 우린 언짢은 상태로 헤어진다.

 

   이제야 알겠다.

   내 구토증은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혐오감이었고, 그것이 그 동안 날 자기증오로 몰아넣었었다.

   난, 이제, 더 이상 내 자신의 존재로부터 숨지 않으련다.

 

   내가 만지는 그 어떤 것에도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벤치에 앉은 나의 눈에 밤나무뿌리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뿌리를 묘사할 말을 찾을 수 없다.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존재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본질이나 속성이란 겉모습 속에 숨어있다.

   뿌리의 크기나 색깔이나 기능을 설명하려는 순간, 뿌리 그 자체 대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될 뿐이다.

   바텐더의 자색 멜빵. 그건 자색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보였던 것일 뿐이다.

   어떤 사물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은 간략화 된 표상일 뿐이다.

   내 구토증은 색깔 맛 냄새 크기 모양 등 존재와 상관없는 것들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존재의 이유를 설명하려 본질이라는 것을 결부시키곤 하는데,

   존재하는 것에는 그것이 왜 존재해야하는지 그런 이유는 없다.

   존재는 우발적contingency인 것이다.

   그저 어쩌다보니 거기 있을 뿐, 그것이 왜 거기에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역시 우연의 산물이다.

   어느 순간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냥 거기에 있는 free gift이다.

 

   내가 이곳 부빌에 왔던 것은 롤봉에 대한 자료 때문이었는데, 이제 연구를 멈췄으니 여기 있어야 할 의미가 없어졌다.

   우선 파리에 가서 애니를 찾아보기로 한다.

 

   실망이다. 예전처럼 예쁘지도 않다.

   수많은 남자들이 자기를 찾는다고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멍해 하는데, 그런 나를 보고 쉴 새 없이 웃는다.

   과거 우리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난 전혀 기억도 못하는데, 그녀는 생생히 기억한다.

   과거의 감정을 살릴 수는 일들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시간과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일치할 것이라는 생각에,

   난, 존재가 본질보다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 내 발견을, 또 나의 구토증의 원인과 깨달음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해주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계속 평행선, 난 그 집에서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애니와 다시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지만, 사실, 이건 만나기 전에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다.

 

   난 혼자, 그 카페에 마지막으로 들어가 그 재즈"Some of these days"를 다시 틀어달라고 한다.

 

옹뜨완느 로깡땅은 그 재즈를 듣고 또 들으면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합니다.

존재에 대한 물음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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