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과 은의 헷지 성격은 그것이 ‘상대방에 의한 위험 counterparty risk’로부터 자유롭다는데서 나온다.
‘중앙은행’이 마구 찍어내는 바람에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면? (인플레이션),
‘회사’가 물건을 대량으로 푸는 ‘배신행위’를 한다면? (에르메스가 생산량을 10배로 늘린다면?),
서울시 전역이 단일 학군이 된다면? (지하철이 거미줄처럼 깔렸으니, 곳곳에 ‘명품학원’이 들어선다면, 강남은?)
하는 식의 ...한다면? ....한다면? 하는, ‘상대방’이 있는 한 언제나 존재하는 위험이 없다는 말이다.
회사의 경영능력이 모자라, 아니면 엉뚱하게 속여 왔다면? (퇴직금 펀드가 ‘펑!’)
‘현물이 아닌’ 금과 은의 경우도 마찬가지. (무슨 리슈 그곳이 부도난다면?)
아파트란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가는 주거상자’일 뿐인데, (이때의 ‘상대방’은 ‘시간’.)
기존의 아파트보다 새로 짓는 아파트가 훨씬 더 고급스럽다면? (현실이다. 건설사의 ‘명품’ 선전에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생각은 좀 더 포괄적 의미로 확장될 수도 있다.
젊은이들의 경제력이 늘어나면 좋았을 텐데, (이때의 카운터파티는 세계적 불황이요, 중국 일본이라는 경쟁국)
이들이 ‘애들’을 많이 낳고 늙은이들이 내놓는 아파트를 사준다면 부동산 거품 타령은 없었을 텐데... (늙은이 vs. 젊은이)
내가 ‘인구 절벽demographic cliff’이라는 ‘큰 그림’을 보아왔다면....(이때는 자신이 카운터파티)
위정자들이 나라를 위하고, ‘이따위’ 정책을 펴지 않았더라면..... (정치인)
우리 부모님이 내게 ‘조금만 더’ 보태줬더라면... (이번엔 엉뚱하게 부모)
아니, 더 근본적인 문제, 부모님이 내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줬더라면... (이번엔 확실한 '과거의' 카운터파티)
더 이상 이야기를 끄는 것은 그야말로 사족蛇足에 사족을 붙이는 꼴.
생존경쟁이라는 엄연한 현실에서 카운터파티의 존재는 세상의 본질이요,
카운터파티 리스크란 표현은 ‘내 입맛에 맞는 시각’에서 보기에 나오는 것일 뿐,
부정적 가능성만 부각시켜 그렇지, 이 세상이 어찌 ‘남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곳이던가?
동물들은 새끼들이 눈을 뜨자마자 ‘사람들이 보기에는 잔인하게’ 훈련을 시키고, 또 일찌감치 독립시키는데,
‘동물의 세계’를 보다보면, 그들의 ‘생존본능’이 빚어내는, 부모에게서 배우지도 않은, 교묘한 솜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중국인들의 자식교육 그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생각은 ‘남에게 속지 않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삼국지三國志 수호지水湖志 또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 나오는 ‘계략’들도 근본적으로는 다 ‘남 속이기’에 지나지 않는데,
거기에서는 ‘당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바보처럼 느껴지도록 이야기가 진행되곤 하지 않는가?
하긴 어디 중국 책만 그런가. 서구의 문학에서는 더 적나라하게 묘사되지 않는가?
동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잔인하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들은 '아름다운 부분'만 추린 것이다.
상대방의 도덕성이 어쩌니 의리가 어쩌니 하는 것은 다 의미 없는 일, ‘당하는 자 바보’, 어떤 변명도 필요없이 그렇다.
부모가 나를 감싸주기만 했지, 그런 능력을 키워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사랑한다. 그것은 본능에서 나온다. 단지 그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가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 아이가 성장하는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보호’이고 어디부터가 ‘과잉보호’인지 그것은 개인 또 배경문화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고,
더구나 어디까지가 ‘사랑의 채찍’이고 어디부터가 ‘부모의 욕심 채우기’인지 거기에 이르면 그 누구도 헷갈리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들의 동화 또 더 큰 아이들이 읽는 책을 '아이의 입장에서' 읽어보는 것,
또 아이가 친구들과 노는 모습을 차분히 '아이의 마음속에서 돌아가는 생각'으로 살펴보고,
그리고 또 시간을 갖고 아이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것, 그 외의 첩경은 없다.
하지만, 단언컨대, ‘객관적’ 시각에서 '훌륭한' 부모 밑에서 자란 젊은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춘기를 지난 후에도 부모에 대해 아쉬움을 갖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치기어린’ 생각이다.
그렇다면 내 학교선생님이 말씀은 다 따랐고, 그래서 ‘세상 실력’은 다 갖췄단 말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나의 카운터파티고,
‘내게’ 무엇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세상 탓’이 아니라 다 ‘내 탓’이다.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도 내 탓, 직장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도 내 탓, 인간관계가 원만치 못한 것도 다 내 탓이다.
지금 ‘내 탓이오!’ 타령을 하려함이 아니다. 어떻게 '누구 탓'할 필요가 없도록 내공을 키울 것인가, 거기에 대해 생각하려함이다.
요즘 매일 병문안을 다니면서 지하철에서 느끼는 서글픈 사실 하나,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가끔 옆자리를 보면 대부분 ‘비생산적’인 화면,
이건 ‘자기 생각’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 파괴하는, 아니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자살행위’에 다름 아니다.
‘살인’이란? 앞으로 '더 살 수 있는 시간'을 빼앗는 것. 그렇다면 '그 시간'을 옮겨 ‘지금’에 삽입한다면? 그것이 바로 살인 아닌가?
사실 내 ‘뚝틀이의 문학산책’을 정리한 것도 몇 년 전 이런 현상에 ‘분노’를 느껴, 어떤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서였다.
그때, 아들과 같이 모처럼 여행을 와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던 어떤 ‘엄마’를 보며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또 가끔 서점에 들를 때마다 느끼는 것.
소위 ‘처세술’을 다루는 베스트셀러들이 장식된 곳에 사람들이 모이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이 ‘업자의 그럴 듯한 말’에 현혹되어 ‘카운터파티에게 당하고 있는 현장’에 다름 아니다.
생각방법은 간단하다. 작년에 재작년에 인기를 끌었던 그 책들이 지금도 그때의 ‘무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
몇 년 전에 사놓았던 책을 다시 펼쳤을 때, 그때 느꼈던만큼 그렇게 고개가 끄덕여지던가?
내공은 단시간에 쌓이지 않는다. '처세술' 몇 권 책으로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학교가 아니고, 직장은 책대로 움직이지 않고, 일의 성과가 인간관계와 동의어이지도 않다.
내 꼭 권하고 싶은 것은 세 가지, 고전 읽기, 외국어 익히기, 산책하기.
겨우 그깟 것이나 권하려 이글을 쓰고 있냐고? 따분하다고? 그렇다 따분하다. 인정한다.
하지만, 내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당위성’이나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권하는 것이다.
일의 본질을 파악하는 눈은 폭 넓은 마음에서 나오고, 이는 폭 넓은 자기 가꾸기와 폭 넓은 자기 다듬기로부터 생긴다.
철학책은 딱딱하지만 그래도 사고체계를 잡아주니 좋고, 역사책은 ‘사실의 모음’을 읽는 것이니 좋다.
그런데, 비록 내 세계와 다른 곳에서 내 생각과 달리 흐르는 이야기지만,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소설이다.
생각해보자. 작가가 설마 어떤 이야기를 ‘소개’하려 소설을 쓰겠는가? 무엇인가를 꼭 이야기해주고 싶어 쓰는 것 아닐까?
그 ‘진실한’ 마음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었기에 시간이 흐른 후에도 사람들의 추천을 받는 것이 아닐까?
내가 접하지 못한 ‘다른 시각’에서 ‘삶의 모습’을 들여다볼 계기를 마련해주는 책, 그것이 고전이다.
중간 중간에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값진 책이고.
그런 면에서는 문사철文史哲이 어우러진 중국고전들이 추천할 만하다.
두 번째는 어학이다. 걱정하지 마시라. 영어를 말함이 아니다.
영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그 시작부터 시험과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감안한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고, 중국어의 효용성은 영어보다 더 직접적이다.
머지않아 자전거로 갈 수 있게 되는 곳도 중국이고, 중국과 관련된 일이 일상생활 곳곳에까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어학이란 ‘말하기’를 배우는 것뿐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배우는 것이요, ‘문화’를 이해하는 길이다.
러시아를 여행할 때, 며칠만이라도 투자해 그쪽 간판 정도만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되면,
남미여행 때 가이드만 따라다니지 말고, 기본만이라도 배워 가면 전혀 다른 느낌 아니겠는가?
이런 식으로 외국어를 배우는데 ‘기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성적’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도 없으니,
그저 틈날 때마다 관심을 갖는 정도만으로도 5년 후 10년 후 20년 후 이렇게 시간이 지나며 실력이 쌓여갈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꼭 추천하고 싶은 것은 산책이다.
등산도 아니요, 따로 시간을 내 공원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냥 걷는 것.
지하철 몇 정거장을 더 걸어가 타는 것도 방법이고, 그것조차 여의치 않으면 집근처를 도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이런저런 일의 연속이고, 더구나 ‘수없이 쏟아지는 생각을 소화’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런데, 걷는 동안에는 ‘마음의 눈’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또 여러 떠오르는 일들도 ‘아까와는 다른 시각에서’ 보이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더 여유롭게 더 넓은 시야각으로 더 깊게 생각하도록 하는 ‘마음의 정화운동’이지 않을까?
이렇게 쌓은 내공이야말로 어떤 counterparty risk도 없는 나의 자유로운 무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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